스토리1

[스크랩] 영롱이의 독서일기 / 왕조실록 [신라] - 3부

보배59 2007. 1. 11. 21:41

왕조실록 [신라] - 3부 후삼국 시대

 

 

 


 

 

 



선덕과 진덕에 이어 세 번째 여왕의 자리에 오른 진성왕
진성왕이 즉위할 무렵 신라 사회는
국가 기강이 무너질 대로 무너지고
체제는 완전히 와해되고 붕괴되어 있는 형국이었다.
비록 헌강왕 시절에 일시적으로 태평성대를 구가하기는 했으나
그 이전에 이미 지방 호족 세력이 너무 성장하여 조정의 힘은 미약해지고
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진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  진성왕의 즉위는 여왕이라는 이유로
백성들의 불안을 가중 시켰고
지방 세력의 힘을 강화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설상가상으로 진성왕은 색욕에 눈이 멀어 정사는 뒷전으로 밀어 놓았다.
이런 탓에 일부 측근들과 왕에게 아첨하는 무리들이 권력을 장악하는 사태로 치달았다.
이때 실제로 왕권을 행사한 인물은 각간 위홍이었다.
- 각간위홍은 대구화상과 함께 왕의 명으로 향가를 수집하여  삼대목이라는 향가집을 엮었으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
위홍이 죽자 지도력을 상실한 조정은 극도로 혼란에 빠졌고
심한 자괴감에 빠진 진성왕은 젊은 남자들을 침실로 불러들여
음사를 즐기는데 열중하였다.
이런 틈에 견훤은 완산주(전주)를 도읍으로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백제(후백제)라 칭함으로써 후삼국 시대의 서막을 올렸다.
견훤은 아버지가 이자개이니 본래 성이 이씨였는데
훗날 견을 성으로 삼았으며 영동황간을 본으로 하는 황간견씨는
견훤을 시조로 하고 있다.

한편 궁예는 신라 47대 현완왕의 아들로
단옷날처럼 양기가 겹친 날에 후궁의 몸에서 태어난데다가
나면서부터 이가 있었고 지붕위에 상서로운 광염마저 생겼다는 이유로
죽을 운명에 처했으나 유모의 도움에 힘입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젖먹이 궁예를 죽이기 위해 왕의 사자가 다락에서 밖으로 던졌지만
유모가 그를 구출하였고 다락 아래에서 아이를 받다가 실수로 손가락이
궁예의 눈을 찌르는 바람에 한 쪽 눈을 잃은 채 살아가야 했다.
어린 나이에 자신의 출생에 대한 엄청남 비밀을 간직한 채 궁예는
절로 출가를 하게 되고 장성하여 송악에 도읍을 정하고
후고구려를 세우니 바야흐로 후 삼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궁예의 죽음에 대해 고려사는 그가 도망치다가
배가 고파 남의 논에 들어가 이삭을 잘라 먹다가
부양의 농부에게 피살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니
불행한 운명을 안고 태어나 평생 부모 사랑 한번 받아 보지 못한 채 살다가 죽음마저도 불운하여 무덤조차 없으니
시체는 버려져 필시 까마귀 밥이 되었을 게 분명하다.
혁명을 꿈꾸던 한 시대의 영웅이자
나라를 세워 20여 년 간이나 왕좌에 있던 인물의 죽음치고는
참담하고 서글픈 종말이 아닐 수 없다.

헌강왕이 사냥 구경을 하다가 길가에 서 있던 한 여인에게서
호감을 가져 뒤 수레에 태웠다가 야합을 하여 얻은 아들이 요인데
이 요가 왕위에 오르니 이가 바로 52대 효공왕이다.
효공왕은 20대 중반의 혈기 방장한 청년으로 성장해있었지만
이미 쇠할 대로 쇠한 국력을 회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
절망감에 사로잡힌 효공왕 역시도 정사는 뒷전이고
총애하는 첩과 음사를 즐기는 데 열중하였다.
애첩과 놀아나며 정사를 돌보지 않자 친정세력들에게 제거당하고
제 8대 아달라왕의 먼 후손이자 헌강왕의 사위였던 경휘가 왕위에 오르니
이가 바로  53대 신덕왕
신덕왕의 치세는 5년 정도 밖에 유지되지 못했다.
이어 신덕왕의 장남 경명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54대 경명왕이다.
경명왕이 즉위하자 태봉에서는 거대한 변화가 일어난다.
국호를 태봉으로 고친 궁예는 중앙집권화 정책 몰두하였고
이를 위한 개혁과정에서 지방 호족들과 대립,
중앙집권화에 반발하는 수많은 호족을 죽였고
심지어 왕후까지도 죽이는 잔인한 면모를 드러냈다.
스스로 미륵이라 자처하며 사람의 마음을 읽는 묘술인 관심법을
무기 삼아 독단과 전횡을 일삼다가
급기야 가장 신임하던 휘하 장수 왕건에게 역모 혐의를 씌워 궁지로 몰다가 되레 왕건에 의해 제거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이 혁명사건으로 태봉은 무너졌고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른 왕건은 국호를 고려라 칭하게 된다.
고려 개국이후 신라의 지방 세력들은 왕건에게 호의를 가지기 시작했고
경명왕 역시도 고려와 타협하여 후백제를 견제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왕건이 송악으로 도읍을 천도,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자
신라 조정은 고려와 친밀한 관계를 맺으려는 시도를 강화하게 되며.
이것은 후백제 견훤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경애왕 역시도 기회 있을 때마다 견훤을 비방하고 왕건을 추켜세우니
이에 분개한 견훤이 신라 도성을 유린,
공포에 질린 경애왕은 스스로 자살하게 되고
경애왕이 죽자 견훤은 경순왕을 왕으로 추대했다.
비록 왕위에 오르긴 했으나 실권은 완전히 상실한 상태.
더구나 견훤은 신라의 도성을 지키던 병사들을 대거 포로로 잡아갔고
심지어 병기를 빼앗고 병기를 만드는 기술자까지도 모두 압송해 갔으니
경순왕의 목숨과 종실의 운명은
모두 고려 왕건에게 의지해야 할 할 판국이었다.
앙위에 오른 경순왕은 경애왕의 시체를 대처에 모시고
여러 신하와 함께 장례 준비를 했다.
고려 태조 왕건이 사신을 보내 조문한  병력을 이끌고
견훤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달려왔으나
복병을 숨겨 둔 견훤의 술책에 말려 사면초가에 빠지고 만다.
포위망을 뜷을 수 없게 되자 신숭겸이 왕의 갑옷을 입고
어차에 올라 싸울 테니 그 사이 변복을 하고 빠져 나가라고 제의했다.
왕건은 신숭겸의 살신성인 덕분에 혼자 목숨을 건져 탈출할 수 있었으니
부하 장수 김락과 신숭겸을 황천으로 보내야 했다
훗날 고려 예종은 이 두 장수을 추모하는 도이장가라는 향가를 지어
위로 하게 된다.
계속 수세에 몰리던 왕건에게 유금필 장수의 선전과
신라 장군들의 잇단 귀순으로 힘을 얻거 결국 백제군을 퇴각시킨다.
승승장구하던 고려 왕건에게 경순왕이 의탁할 속내를 드러내자
신라 신하들이 대거 고려에 귀순해 버리게 된다.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이 항복을 알리는 편지를 왕건에게 전했다는
소식을 접한 태자는 비통한 표정으로 통곡하며
왕에게 하직 인사를 전하고 개골산으로 들어가 바위 아래 집을 짓고
삼베옷을 입은 채 풀잎을 먹으며 일생을 마쳤다.
삼베옷을 입고 지냈다하여 마의 태자라고 불리웠다.
왕건에 의해 후삼국이 통일된 연후에도 경순왕은 녹읍으로 받은
경주지역을 다스리며 살았으니
왕조의 흥망과 상관없이 개인적으로는 부를 누리고 살았던 것이다.

한반도 최초의 통일국가 신라
천년 왕국 신라
보잘 것 없던 소국 신라가 삼한 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혹자들은 화랑제도가 삼한 통일의 원천적인 힘을 제공했다하기도 하고.
한편에서는 의가제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것이 화랑제도에서 기인했든 아님 의자제도에서 연유되었든
이 책을 읽는 동안
웅지의 고구려인들에게나 한의 백제인들에게는 볼 수 없었던
어떠한 신비함 같은 것이 신라인들에게 느껴졌다.

뭐니 뭐니 해도 놀라운 일은 현재의 잣대로 본다면
가당치 않은 일들이 신라 사회 곳곳에서는
당연한 일처럼 일어나고 있었다는사실이다.
왕과 맞먹는 막대한 권력을 가진 자들은
그가 유부남이든 유부녀이든 가리지 않고
맘에 드는 사람을 취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으로써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신분 상승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고는 하나
돈 없고 빽 없는 사람들은 남편이나 아내를 빼앗기고도
말 한마디 할 수 없었으니
예나 지금이나 다를  없다.
입이 있어도 함구해야 하고
주먹이 있어도 휘두를 수 없으니....
더구나 신라인들은 남편이나 아내를 빼앗기고도
그저 “ 이미 앗아간 것을 어찌할 꼬 (처용가의 마지막 부분처럼) 하고
한탄만 하고  있어야 했으니 그 속이야 오죽했을까?
너그러움이 아니라 체념이었다고 생각하면 내 속이 다 타버리는 심정이다.
억울해도 법이 그러하니 하소연 할 데도 없고.....
수양이 단종을 죽인 일과 비슷한 사건들도 수 없이 자행되었다.

 

 

 

출처 : 영롱이의 독서일기 / 왕조실록 [신라] - 3부
글쓴이 : 금강하구사람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