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조실록 [후삼국 정리]
고려 왕조 실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후삼국 실록에 대한 이해가 우선되어야 한다.
그런 이유로 후삼국 실록을 다시 정리해
본다.
신라 문무왕이 고구려를 함락시키고 삼한 지역을 통일한 후
신라 왕조는 창업이후 최대 전성기를 맞이한다.
즉
정치, 사회, 문화, 군사 전반이 안정되어 황금시대를 구가하게 된다.
그러나 통일 이전 신라 조정을 주도했던 귀족 세력의 입지는 약화되어
성덕왕대에는 전제정치가 극점에 이르게 되고
경덕왕대에는 귀족들의 조직적인 반발을 해소하기 위해
토지개혁을 비롯한 개혁정치를
실시하지만
권력집중화에 실패하게 되면서 왕권은 급속도록 약해진다.
혜공왕대에는 피비린내 나는 정권다툼이 가열되고
급기야 혜공왕은 상대등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혜공왕을 죽이고 선덕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신라 조정은
혼란기로
치닫는다.
아들이 없이 선덕왕이 죽자 열세 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애장왕
어린 조카 애장왕을 대신하여 섭정을 하던
김언승(현덕왕)이
왕위를 탈취하는 상태에 이르니 귀족들의 불만은 팽배해 진다.
조정이 정권 다툼으로 혼란을 거듭하자 지방의 호족들이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고 김헌창이 난을 일으킨다.
김헌창의 난은 실패로 끝났지만 김헌창의 난 이후
지방 세력의 힘이 강화되고
장보고 같은 독자적인 거대 해상 세력이
등장하게 된다.
헌덕왕은 겨우 겨우 정권을 유지했나 헌덕왕이 죽자
조정은
혼란에 빠지고 헌덕왕의 아우 흥덕왕이 사망하자
왕위 계승을 위한 정권 다툼이 벌어진다.
조카가 삼촌을 살해하고 왕이
되니 그가 43대 희강왕이다.
하지만 거사를 도모했던 김명(44대 민애왕)과 이홍이 반란을 일으켜
측근들을 살해하자 희강왕은
스스로 목을 매달아 자결함으로써
왕위는 김명의 차지가 된다.
민애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신무왕 역시 즉위 5개월 만에
종기로 죽고
문성왕이 왕위에 올랐으나 자신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장보고가 반란을 일으켜 조정을 위협하게 되고
장보고 난이 진압되자
청해진 세력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문성왕은 청해진을 해체하기에 이르른다.
하지만 청해진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지방 세력은 힘이 강화되었고
48대 경문왕과 49대 헌강왕의 왕권 회복 운동에도 불구하고
조정의 힘은 더욱 무기력해
진다.
더구나 50대 정강왕의 뒤를 이어 51대 왕위에 오른 진성왕은
색욕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고
각간위홍과
간통, 그를 요직이 앉혀 궁정을 돌보게 하고
위홍이 죽자 젊은 청년들을 궁중으로 불러 들여 음사를 즐기기에
여념이 없었으니 진성왕의
총애를 입은 그들이 조정을 독식하며
뇌물을 일삼고 상벌을 함부로 내려 국가 기강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여왕과 조정을 비방하는 방이
나붙고 전역이 지독한 가뭄에 시달려
백성들은 세금도 제대로 내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지고
강제로 세금을 독촉하자 농민들의 반란이
일어나고 산적이 들끓었다.
이런 가운데 사벌에서 봉기가 일어난다.
사벌 봉기의 성공은 민심 저변에 깔려있던 불만을 폭발시켜
천년왕국 신라의 쇠망을 재촉하는 혁명의 들불이 된다.
신라 조성이 사벌의 반란군 진압에 실패하자
그것을 도화선으로 전국
각처에서 반란이 잇따라 일어났고
지방호족들이 우후죽순으로 군대를 일으켰다.
사벌의 아자개(견훤의 아버지)는 백성들에게 열렬한
호응을 받았고
이에 힘입어 견훤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마침내 혁명 의지를 굳히고
무진주(전남광주)를 장악하여 스스로 왕이라
칭하기에 이른다.
한편 기훤의 독단적인 처사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궁예는
양길에게 투항함으로써 기훤은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락하게 되고
양길은 견훤 못지 않은 세력으로 성장한다.
이런 상황에서 남쪽으로 진출한 견훤은 완산(전주)을 도움으로 삼아
백제(후백제)라
칭하고 견훤의 창업에 자극을 받은 궁예는
명주(강릉)을 장악하고 양길로부터 독립한다.
이 소식을 들은 양길이 분을 참지 못하고
궁예를 공격했으나
대패하게 되고 이후 궁예는 고구려(후고구려)를 세워 왕위에 오르니
신라, 백제, 고구려의 후삼국 구도가
확립되었다.
궁예와 견훤의 주도권 다툼에서 고구려(궁예)의 장수 왕건의 활약으로
궁예는 영토 병력면에서 견훤을 앞지르게 되고
세력이 확대되자
중앙집권화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왕권 확립에 주력한다.
국호를 태봉으로 개칭하고 호족들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는
한편
대대적으로 개혁정책을 단행한다.
그 과정에서 호족들과의 갈등이 심해지자 궁예는 반발세력에 대한
가혹한 정책을 일삼고
역모에 대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차에
왕창근의 거울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왕창근의 거울 사건은 왕창근이라 상인이 묘한
내용의 글이 새겨진
거울을 들고 궁예를 찾아오면서부터 시작된다.
새겨진 글의 내용이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아 거울을 얻게 된 이유에
대해 묻자 노인에게서 얻었는데 그 노인은 토성신의 환신에 틀림없다는
말을 한다.
창근의 거울을 접한 궁예는 내용이 예사로운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석학들을 궁궐로 불러 글귀를 해석토록 하였다.
삼수중과 사유 아래 옥황상제가 진마에 아들을 내려 보냈다는 것은
진한과 마한 땅에 아들이 내려 보냈다는 뜻이요
사년에 두용이 나나타서 하나는 청목 속에 모습을 감추고
다른 하나는 흑금
동쪽에 모습을 나타낸다는 것은
청목은 소나무이니 송악을. 흑금은 철을 이르니
철성에 기반한 것이 아니겠냐는 해석을
내린다.
하지만 석학들은 의논 끝에 축이 멸하고 유가 일어난다는 것은
정축년에 태어난 폐하가 멸하고 정유년에 태어난 왕대인이
일어난다는
뜻인데 사실대로 고했다간 왕건에게 피해가 갈까봐서 적당한 선에서
꾸며서 보고를 하게 되었지만 의심이 많던 궁예는
왕건을 불러 모반을 계획했는지를 묻는다 .
복종하지 않았다가는 목숨이 위태로울 것이라는 장주의 말에
거짓으로 역모를
인정하였고 궁예는 왕건을 정직한 사람이라 하여
금장식한 말안장과 굴레를 왕건에게 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왕건은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고
역모에 뜻을 품었다가 급기야 군사를 모아 왕성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왕건이 군사를 몰고 왕성으로
쳐들어오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궁예는 변복을 하고 왕성을 몰래 빠져 나가 겨우 목숨을 건지기는 했지만
산야를 전전하다가
살해되었다.
왕건이 왕으로 등극하여 국호를 고구려의 뒤를 잇는다는 의미에서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라고 하였다.
왕건은
호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각 지역의 유력한 인물들과 결혼을 통한
인척관계를 맺는 한편 후백제와 신라에 대해서도 유화적인 태도를
보인다.
견훤은 호전적인 궁예보다는 왕건을 상대하기 편하다고 판단하여
교류를 추진하게 되고 신라 역시도 신라 장수 출신인
까닭에
역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견훤보다는 호족 출신인 왕건을
믿을 만한 인물로 판단하고 있었다
하지만 견훤이 신라를 침범함에
따라 고려 건국 이후 2년여동안 지속되던
평화는 깨지고 후백제의 통일 정책은 가속화되는 양상을 띤다.
이 때문에 신라 호족들은
고려에 투항하며 후백제의 신라 침범을
불쾌하게 여기던 고려는 본격적으로 후백제를 견제하기 위한
싸움에 돌입한다.
그러다
인질을 교환하는 조건으로 화의를 맺었으나
고려에 인질로 갔던 견훤처의 친족 진호가 죽자 견훤은 독살로 간주하여
왕건의 사촌동생
왕신을 죽인후 고려를 기습하니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 되었다.
고려와 후백제 싸움이 시작되자 신라는 견훤이 약속을 어기고
군사를 일으켰다면서 왕건을 지원하게 된다..
견훤은 공산싸움에서 고려군을 대파한다.
왕건은 고려의 개국공신 신숭겸과 김락등
뛰어난 장수들을 잃게 되고
훗날 예종은 도이장가라른 향가를 지어 두 장수를 추모하게 된다.
한 동안 열세에 있던 고려는 병산싸움에서
전세를 바꿔 놓는 데
성공하게 되고 신라 경순왕를 비롯한 신라 세력들도 고려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진다.
한편 운주성
전투에서 패배한 견훤은 심한 패배감에 젖어 지내다가
설상가상으로 태자 책봉문제로 내분을 겪으면서
백제는 망국의 길로
접어든다.
견훤은 여러명의 아내에게서 10여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견훤은 넷째 금강을 가장 총애하였고
왕위를 금강에게 물려
주려고 했지만
주위의 반대로 태자로 세우지 못한다.
그러다가 운주전투에서 금강을 태자로 지명하자
신검을 위시한 반대파들이
반란을 일으켜 금강을 죽이고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시켜 버렸다.
신검의 반정이후 금산사에 갇혀 있던 견훤은 유폐된지 3개월 만에
나주로 탈출하여 고려에 귀순하게 되고
신검이 왕위에 오른 다음 달 신라 경순왕이 스스로 신하들을 이끌고
개성으로 가서
왕건에게 투항하니 대세는 왕건에게 기울어졌다.
더구나 신검의 매형이자 견훤의 사위였던 박영규마저 고려에 귀순해 오자
왕건은 신검을
응징하게 위해 나선다.
신검은 왕건 군에게 대패하고 신검이 항복해오자
후삼국 시대는 종막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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