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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영롱이의 독서일기 / 왕조실록 [고려] - 1부

보배59 2007. 1. 11. 21:40

왕조실록 [고려] - 1부

 

 


 

 

 

 

 


 

 

 

 

 

 

 

 

고려는 견훤이 신검에게 쫒겨 투항해 오자 대병을 일으켜
후백제를 무너뜨리고 통일을 이룩함으써
한반도에서 우리 민족이 자주적으로 일궈낸 최초의 통일국가였다.

태조 왕건은 통일 이전부터 호족들과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혼인정책이라는 화합책을 펼쳤고
이런 이유로 왕건의 후비는 29명이나 되었다.
이러한 혼인정책은 훗날에 고려를 왕권 다툼의 각축장으로 몰고 가게 된다.
여하튼 왕건은 송악으로 도성을 옮겨 앙성을 안정시키고
민심을 수습하려고 노력하였고 결혼을 통한 인척관계를 맺는 한편,
후백제와 신라에 대해서도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고려의 안정을 위해 전력을 다하던 왕건은
박술희를 불러 훈요 십조를 전하는데
훈요십조는 왕이 지켜야 할 도리를 적은 것으로
왕건이 후대 왕들에게 내린 왕실 헌장 같은 것이다.
고구려는 고씨의 고을, 위대한 성읍이란 뜻이고
고려는 고구려의 줄임말이거나 구루에 대한 한자식 표기로 볼 수 있다.

궁예의 신하로 있던 시절 왕건은 나주를 점령하고 그곳에서 오씨를 만나
동침을 했지만 오씨 가문이 한미한 탓으로 임신시키지 않으려고
정액을 돗자리에 배설하였는데 왕후가 그것을 흡수하여 임신이 되었고
이렇게 해서 세상의 빛을 보게 된 이가 2대 혜종
혜종은 얼굴에 돗자리 무늬가 새겨져 있다고 하여 주름살 임금이라고
불렀다고 고려사에 기록하고 있다.
혜종이 집권한 이후 고려 조정은 왕위 계승을 노린 정치적 암투에
휘말리게 되고 혜종이 병을 얻자 충주 유씨와 서경파를 중심으로
왕으로 세우니 이가 바로 3대 정종

정종은 즉위 과정에서 너무 많은 인명을 죽인 죄를 씻기 위해 불사리를
만들었으며 광학보를 설치하여 불교를 장려하고 승려를 양성하는
불교 진흥책을 실시한다.
그러나 죄책감에 시달린 나머지 동여진에서 보내온 토산물을 검열하다가
갑자기 몰아친 우레와 천둥소리에 놀라 경기가 들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병상에 누웠다가 2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만다.

정종의 뒤를 이은 광종은 왕권을 강화하고 호족의 힘을 약화시켜
중앙집권화를 확립한다.
후주의 대리평사 쌍기를 끌어들여 과감한 개혁 작업에 착수하게 되는데
호족의 경제력을 원천적으로 약화시킬 목적으로 노비안건법을 마련하고
조정 내에서 호족의 전횡을 막을 새로운 세력을 양성하기 위해
과거제를 도입한다.
하지만 개혁과정에서 중국에서 귀화해온 세력에게 지나치게 많은 힘을
실어줌으로써 내국 관료들의 원망을 듣게 되고
역모에 대한 경계가 심해 신하들을 함부로 죽이는 폐단을 남겼다.
귀화인들의 등용에 최승로 등이 강력히 반대하였고
특히 서필(서희의 아버지, 이천 서씨라고 아들은 좋아한다.)은
광종이 내국 신하의 집을 빼앗아 귀화인들에게 지급하는 등
지나친 대우에 반발하여 스스로 자기 집을 바치겠다고 말한다.
광종이 그 이유를 묻자 어차피 빼앗길 바에야 미리 바치는 것이
현명한 일 아니겠냐고 대답하여 광종의 분노를 자아내지만
결국 광종은 서필의 말이 옳음을 깨닫고
이후 신하들의 집을 빼앗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귀화인들에 대한 광종의 특별대우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고
호족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가혹한 숙청작업을 벌여 공포정치를 실시하니
빛나는 업적인 과거제도마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광종은 무질서한 복장이 조정의 기강을 흐트리고 왕의 권위를
약화시킨다고 하여 공복의 색깔을 자삼(자색), 단삼(붉은색), 비삼(진홍색),
녹상(녹색)등으로 달리하여 착용토록 하였다.

광종이 죽고 경종이 즉위하자 호족들이 다시 힘이 회복하여
광종대의 수모와 앙갚음을 하기 위해 복수전을 펼친다.
혜종의 아들과 정종의 아들이 역모에 휘말려 죽게 되고 광종을 제거하고
공포와 불안 속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태자가 호족들의 힘에 의해
왕위에 오르니 이가 바로 경종
경종은 즉위하자 대사면령을 내려 귀양 중에 있는 신하들을 돌아오게 하고
갇혔던 사람들을 풀어주고 관직을 빼앗긴 사람들을 복직시켰으며
광종대에 설치되었던 임시 감옥들을 헐어 냄으로써 공포정치는
막을 내린다.
전시과를 마련하여 토지제도의 혁신적인 변환을 도모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련의 왕권강화책을 시도하던 경종이 호족 세력의 견제를 받아
쫓겨난 최지목을 등용하여 정적들을 역도로 몰아 제거하는 사건 이후
경종은 날마다 오락을 일삼고 여색과 바둑으로 시간을 보내는 등
방만한 생활로 일관하다가 마음의 병이 깊어져
결국을 숨을 거둔다. 27살의 젊은 나이였다.

유학적 소양을 두루 갖춘 6대 성종이 집권하면서
고려사회는 유교사회로의 전환을 하기 위해 대대적인 체제 정비작업에
돌입한다.
성종은 전국을 10개의 도로 나누는 10도제를 도입하게 되는데
이것은 처음으로 도 단위로 구분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우리나라 도제의 시초
성종대에는 거란이 침입하여 소손녕이 항복을 권유하는 위협적인 서한을
보내자 서희가 그와 담판을 짓고 압록강 동쪽 6주(강동6주)를 얻어내는 데
성공하여 고려 영토는 압록강 변까지 확대된다.
성종은 3성 6부제를 통한 중앙 관제를 확립하고
유학의 진흥과 교육 개혁을 통해 중앙집권화정책을 실시하였으며
전국 12목에 경학박사와 의학박사를 파견하여 대대적인 유학열풍을  
일으켰다.
또한 국자감을 설치하는 등 전국에 학교 설립을 추진하였으니
향교의 전통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성종대에는 송나라에 사은사로 갔던 한언공이 대장경을 들여와
불경사업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기도 했다.
효자와 절부를 표창하여 풍속을 아름답게 하였던
성종은 22세 왕위에 올라 16년 동안 고려 안정과 번영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였다.
개혁을 이끌되 성급하지 않았고 중앙집권화를 꾀하되
결코 귀족 세력을 무시 하지 않았으며
귀족 사회를 이끌어 내면서도 서민들의 삶을 간과하지 않는
중용의 덕을 갖추었다는 성종도 최승로가 없었다면
개혁정책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성종이 죽고 18세 어린 목종이 집권하자 왕권은
그의 모후에게로 넘어가게 되고
왕권을 빼앗긴 목종은 절망한 나머지 정사는 소홀히 하면서
엉뚱하게 남색을 즐기기 시작한다.
당시 용모가 남달리 아름다웠던 유행간은 목종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되어
벼슬이 합문사인에까지 오르게 된다.
목종은 남색을 즐겼던 탓인지 소생이 없었고 결국은 객지에서
비명횡사하게 된다.
-강조의 수하들이 살해하고 자살한 것처럼 꾸밈-

목종에 이어 현종이 왕위에 오른다.
현종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거란의 침입으로 몽진하는 신세가 된다.
태어나면서 어머니와 사별하고 성종에 의해 궁중에서 양육되다가
목종이 강조에 의해 폐립되자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현종은 음악을 가르치던 교방을 혁파하고 목종대 늘어난 궁녀들을
대거 해방시켰으며 연등회를 부활하여 백성들의 화합을 도모하는 한편
동북 변방으로 이주시켰던 남도 출신 양민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등
민심을 진작시키기 위한 일련의 정책을 실시하지만
즉위 초부터 전란에 휘말려 고초를 겪는다.
거란이 목종 폐위를 구실삼아 고려를 침략했기 때문이다.
강감찬의 귀주대첩이 유명한데 강참찬은 문인이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사회가 안정되자 현종은 전란으로 소실된 문화재와 사적들을 복고하고
황룡사를 비롯한 사찰을 중수하게 하며 6천여 권의 대장경도 편찬토록
하는데 이것은 후에 원나라 침 중에 만들어지는 팔만대장경의 모태가 된다.
현종대 중국 송나라에서는 화약과 나침반이 발명 되었다.

16세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은 덕종은 나이답지 않은 너그러움과 섬세함을
바탕으로 명민한 정치를 펼쳐 나가지만 병약한 탓으로 왕위에 오른 지
3년 여 만에 생을 마감한다.

10대 정종 시대로 접어들면서 고려 사회는 거란 침입으로 야기되었던
혼란을 극복하고 평화기를 정착시킨다.
정종은 노비종모법을 제정하고 악공과 잡류들의 자손들이 과거에
진출하는 것을 금지시켰으며 장자 상속법을 마련한다.
하지만 정종의 치세는 오래 가지 못한다. 17세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기력을 쇠진한 탓에 몸이 병약해졌고 나약한 몸으로 정사에 몰두하다가
중병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고려의 황금기를 열게 되는 11대 문종대에 고려는 문화와 대외적 위상이
한층 격상된다.
양반 전시과가 개정되어 토지법이 완성되고 문무백관과 노역자의
녹봉제도가 확립 되었으며 향리의 자제를 인질로 삼아 개경에
머물게 함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던 선상기인법이 제정되기도 한다.
문종대 정치와 외교가 안정되고 더불어 학문적으로도 대단한 발전을
이룩하게 되는데 이 학문의 발전을 주도한 인물이 최충이다.
최충은 나이 일흔이 되어 스스로 퇴직을 신청하고 사립학교를 설립,
인재양성에 총력을 기울였으니 고려 사회 전방에 사학이 급속도로
발전하게 되었고 급기야 사숙 중심의 사학이 관학을 압도하게 되었으며
해동공자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문종은 흥왕사를 창건하였고 성종이후 폐지된 연등회와 팔관회를
공식적으로 부활시켰으며 타락한 승려들을 환속시켜 사찰을 청정도량으로
되돌려 놓는 작업에도 박차를 가했다.
문종의 아들 대각국사 의천도 출가시켰으며 의천에 의해
천태종이 도입되어 선불교 운동이 일어난다.
문종대에 이자연이 실세로 등장하게 되는데
이자연은 인종대에 일어나는 이자겸의 난을 일으키는 이자겸의 조부이다

12대 왕위에 오른 순종은 문종이 죽자 그 슬픔과 상중의 피로함을
이기지 못하고 즉위 3개월 만에 임종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재위기간이 가장 짧은 왕이 되었다.

순종이 죽자 문종의 둘째 아들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13대 선종
선종대에는 불교와 유교의 균형적 발전을 토대로 안정된 시기였으며
외교에서도 거란, 송, 일본, 여진등과 광범위한 교역을 추진하여
주도권을 행사하였다.
의천에 의해 많은 불경이 도입되고 간행되어 팔만대장경의 기틀이 되는
속장경이 마련되기도 한다.
선종대 프랑스에서는 롤랑의 노래가 완성되고
이탈리아에서는 볼로냐 대학이 설립된다.

14대 헌종은 유아시절부터 소갈증에 시달려 병약했으며
숙종에게 왕위를 찬탈 당한다.

어린 조카를 밀어내고 즉위한 숙종이 즉위함으로써 고려 조정은
대대적인 숙청작업에 휘말리지만 점차 안정을 찾는다.
그러나 여진족의 성장으로 변방이 불안해짐에 따라
외교 관계에 변화가 생기고 군사제도 개편 등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적응하기 위해 안간힘을 쏟는다.
숙종은 6촌 이내 금혼령을 내리는데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이때부터 족내혼을 금기시하는 풍조가 생겼다.
주전관을 두고 주화를 만들어 통용하게 하였고 고주법을 제정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화폐인 해동통보를 주조하여
문무양반과 군인들에게 분배하였다.
국자감에 서적포를 설치하여 인판사업을 확대하였으며
군사적으로 여진에 대항하기 위해 윤관의 주장으로
별무반을 조직하게 된다.
숙종은 고구려 동명왕의 묘역에 제사를 지내고  돌아오는 길에 병을 얻어
환궁하지 못하고 노상의 수레 안에서 생을 마감한다.
숙종대 유럽 전역에서는 기사문학이 성행하고
프랑스에서는 음유시가 유행한다.

16대 예종은 성장하는 여진의 남하를 막는 동시에 거란에게 잃었던
압록강 변을 되찾는 작업에 총력을 기울이게 된다.
즉위 초 여진과 끊임없는 전쟁으로 어수선한 분위기가 지속되지만
압록강 변을 회복한 다음 안정을 되찾게 된다.
예종은 관학의 진흥을 꾀하였으며, 청연각과 보문각을 짓고
학사를 두어 경적을 토론하게 하는 한편 송나라에서 대성악을 들여오는데
이것이 아악의 시초이다.
국학에 양현고라는 장학 재단을 설치하였고 개국 공신인 김락과 신숭겸을
추모하는 도이장가를 짓기도 했다.
 
* 도이장가(悼二將歌) *

主乙完乎白乎
心聞際天乙及昆
魂是去賜矣中
三烏賜敎識麻又欲
望彌阿里刺
及彼可二功臣良
久乃直隱
跡烏隱現乎賜丁


님을 온전하게 하온
마음 하늘 끝까지 미치니
넋은 갔으되
임께서 내려주신 벼슬은 또한 대단하구나.
바라보며 알겠구나.
그 때 두 공신이여
오랜 옛날의 일이나 곧은 자취는
나타나는구나.

예종은 또한 해민국을 설치하여 빈민들의 질병을 돌보게 하고
예의상정소를 설치하여 민간 예의의 원칙을 정착시켰다.
등에 자그마한 종기가 발견되어 병상에 누워 지내다가
17년간의 재위 기간을 끝으로 생을 마감한다.

예종이 죽고 14세 어린 인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고려 조정은
또다시 권력 암투의 아수라장으로 전락한다.
이 때문에 인종은 장인이자 외할아버지인 이자겸에게
왕위를 빼앗길 뻔 하는 위기를 맞이하기도 하고
묘청이 이끄는 서경세력과 김부식이 중심이 된 개경 세력 사이에 끼어
수동적인 정치로 일관한다.
인종 대에는 신라왕족의 후예인 김부식에 의해 삼국사기를 편찬하는
문화적 업적을 남긴다.
이자겸의 난 이후 경원이씨는 몰락하게 되고 이후 귀족반열에서
이씨는 자취를 감추게 된다.
이자겸이 죽고 나자 장모이자 외조모인 최씨를 개경으로 소환하여
변한국 대부인에 봉하고 이자겸을 한양공에 봉함으로써
인종은 원수를 용서하고 덕을 펼친 관용 있는 왕이라는
김부식의 평가에 따라 仁자를 붙여 묘호를 인종이라 하였다.

묘청의 난 이후 개경 문신귀족들이 정권을 장악한 가운데
즉위한 18대 의종은 왕권 회복을 위해 친위 세력 형성에 주력한다.
이로 인하여 환관과 내시들의 힘이 막강해지고 그들과 언간들 사이
치열한 힘겨루기가 전개되고 그 틈바구니에서 멸시 당하던
무신들이 반란의 기회를 엿보게 된다.
의종은 거의 3일에 한번씩 연회를 베풀었고
호위병들의 불만이 점차 고조되어 마침내 반란으로 이어지게 된다.
수박희 시합 중에 한뢰가 대장군 이소응의 뺨을 대리는 사건이 발생하여
정중부를 비롯한 무관들이 분노하게 되고 무관들이 문관을 죽이고
난을 일으키니 고려 조정은 무신들에 의해 장악되었으며
향후 100년간 무신 정권 시대가 열린다.
역모 죄로 귀양을 가게 된 정서는 귀양지 동래에서 정과정곡 등
고려가요를 남기며 실세였던 정습명 역시 석죽화라는 한시를 남긴다.

 * 정과정곡 *
憶君無日不霑衣
政似春山蜀子規
爲是爲非人莫問
只應殘月曉星知

(前腔) 내 님을 그리워하여 울며지내니
(中腔) 山접동새와 난 비슷하여이다.
(後腔) 아니시며 거짓인 줄 아으
(附葉) 잔월효성(殘月曉星)이 알고 있으리이다.
(大葉) 넋이라도 님과 한곳에 가리라 아으
(附葉) 우기시던 이 뉘더시니잇가.
(二葉) 과(過)도 허물도 천만(千萬) 업소이다.
(三葉) 무리의 말이신저
(四葉) 슬픈 일이저 아으
(附葉) 님이 나를 아마 잊으셨는가.
(五葉) 아소 님하, 돌려 들으셔 괴오쇼셔.

* 석죽화 (石竹花) *

世愛牧丹紅
栽培滿院中
誰知荒草野
亦有好花叢

色透村塘月
香傳?樹風  
地僻公子少
嬌態屬田翁

사람들은 모란의 붉음을 좋아하여
뜰 안에 가득 가꾸고 있구나
누가 알랴,
거친 초야에도 예쁜 꽃 떨기 피고 있는 꽃을
그 빛 시골 연못 속 달에 어리고
그 향기 바람 언덕 나무로 흩어 진다

궁벽한 시골이라 부귀한 이 적어서
늙은 농부만 그 아름다움 즐기노라


정중부가 초급 장교 시절 김돈중이 정중부의 수염을 태운 사건으로
문관들에 대한 악감정을 품게 되었고 섣달 그믐의 축제 중에 김돈중을
흠씬 두들겨 패 요절을 내 버렸다.
이 사건으로 김부식(김돈중의 아버지)이 분노하여 인종에게 정중부를
매질할 것을 요청하지만 인종을 정중부를 아낀 나머지
몰래 도망을 시켜 화를 면하도록 한다.
의종대에 중국에선 여류 시인이 이청조가 왕성한 활동을 하며
영국에서는 아서왕 이야기가 완성되고 옥스퍼드 대학이 설립된다.
프랑스에서는 파리 대학이 설립되고 노틀담 성당이 건축되었다.

출처 : 영롱이의 독서일기 / 왕조실록 [고려] - 1부
글쓴이 : 금강하구사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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