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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영롱이의 독서일기 / 조선왕조실록 1부

보배59 2007. 1. 11. 21:37

 

 

 

조선왕조실록 1부

 

 

 

 

 


 

 

 

 

 


조선시대는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중세와 근대로 나누기도 하고
훈민정음 창제를 기준으로 중세전기와 후기,
임진왜란을 중심으로 근대 전기와 후기 등으로 나누기도 한다.
하지만 보통은 조선 전기와 후기를 구분할 때
임진왜란을 그 기점으로 삼기에
나 역시도 조선 왕조 실록을 임진왜란(선조왕)을 전후로 하여
1부와 2부로 나누어
1부에서는 태조 이성계에서부터 선조왕까지를 적고
2부에서는 선조왕 이후 순종까지를 적는다.
다만 국문인의 관점에서 적다 보니
국문학도가 꼭 알아야 할 부분을 중심으로 적게 되었으며
개인적으로 야사에 관심이 많아서 고우영이 쓴 조선야사 실록을 읽은 후
왕조실록(정사)에 야사 실록을 첨가하는 방식을 취했다.

우선 조선왕조실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려 말 이성계의 등장에 대해 알아볼 필요성이 있다.

이성계는 쌍성총관부 수복 전쟁을 시작으로 위화도 회군에 이르기까지
약 30여년을 전쟁터에서 살다시피 했지만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았던 맹장이었다.
고려에 창궐하고 있던 왜구를 황산대첩에서 섬멸하는 등
혁혁한 전공에 힘입어 고려 조정에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해 갔으며(최무선이 화약과 화통을 응용한 포를 등장시킨 것이
이 시기이다.) 명의 요동을 공략하기 위해 압록강 하류에 있는 위화도에
진을 치고 있다가 말머리를 돌려 개경을 공략, 개경을 함락시키고
요동정벌을 명령한 최영을 축출, 우왕을 폐위하고
강화도로 보내는 한편 정권을 장악하여 창왕을 옹립한다.
그러나 창왕을 왕씨가 아닌 신씨라는 이유로 다시 폐위시키고
정몽주등과 함께 폐가입진의 논리를 내세워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을 등극시킨다.
하지만 공양왕의 스승이자 수문하시중으로 있던 정몽주가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방원의 사주로 살해되자
조준, 정도전, 이방원등의 추대에 힘입어 공왕양을 공양군으로 강등시켜
원주에 유배시키고 왕으로 등극한다.
한편 공양군은 원주, 삼척 등을 떠돌다가
이성계의 명에 의해 처형당하게 된다.
이때 이성계는 왕씨 일가를 모조리 멸족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고
전국에 방문을 붙여 왕씨들을 한 곳에 수장시킨 것으로 전해지며
왕씨 후손들은 아버지의 성을 따르지 못하고 어머니 성을 따르거나,
全씨, 玉씨, 田씨등으로 속여 목숨을 부지하게 된다.
이성계는 즉위 초에는 고려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고
의장과 법제도 등도 고려의 것을 유지하겠다고 선언하지만
차차 새 왕조의 기틀이 갖추어지자 국호를 조선으로 확정짓고
무학의 의견에 따라 한양을 새 수도로 삼는다.

* 무학의 부모는 고려 말 당시 해안지방에 자주 출몰하던 왜구에게
끌려가다 간신히 탈출하여 안면도에서 갈대로 삿갓을 만들어 팔던
하층민이었으며 무학은 파자점과 해몽술에 능했다고 전해진다.
한번은 이성계가 문자를 짚어 보이자 어느 쪽으로 보나 君象이라 하여
임금이 될 것이라 예언하였고 꿈에 서까래 세 개를 지고 나왔다는
이성계의 말을 듣고 王자라고 하여 이성계에게 왕이 될 꿈을
버리지 못하게 한 것으로 전해진다.

태조 이성계는 법제를 정비하고
정도전의 조선 경국전을 비롯한 각종 법전을 편찬하도록 하였으며
억불숭유정책을 시행하였다.
여덟 째 아들 방석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이 화근이 되어
방원이 방석과 방번을 살해하게 되는 1차 왕자의 난이 발발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
왕자의 난 이후 상심한 이성계는 둘째 방과(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주고 상왕이 되었다.
한편 방원이 방간의 제 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고 왕위에 오르게 되자
태조는 방원에 대한 증오심을 간직한 채 소요산으로 떠났다가
함흥에 머물렀는데 이 때 방원이 문안을 위해 차사를 보내면
그 때마다 죽여 버려 함흥차사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태조 시대는 육의전과 보부상이 등장하여 시장경제에 활성화를 촉진시킨다.
 * 육의전을 구성하고 있는 점포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하기는 했지만
대개 비단전, 무명전, 명주전, 종이전, 모시전, 생선전등이었다.
보부상은 보상(봇짐장수)과 부상(등짐장수)을 통칭한 것으로
시장을 중심으로 행상하면서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교환경제를
매개로 했던 전문적인 상인을 일컫는데
보부상은 고대 사회부터 존속해왔지만 보부상인 단체가 조직된 것은
조선 개국이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태조가 첫째부인 한씨 소생의 장성한 왕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강씨 소생 여덟째 아들 방석(당시 11세)을 세자로 책봉하게 되자
혈기왕성한 26세의 방원은 정도전 일파를 습격해 살해하고
세자 방석을 폐위하여 귀양 보냈다가 방석의 동복형 방번과 함께
죽이는 (제 1차 왕자의 난) 폐륜에 가까운 행동을 한다.
이때 태조는 병중이었고 상심한 나머지 왕위를 내놓고
장남 방우가 병사하고 없기에 방언의 뜻에 따라
방과가 왕위를 잇게 되니 이가 조선조 2대왕 정조.

정조 뒤를 이은 3대 태종은 시정을 살피고 백성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자유롭게 청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신문고제도를 마련했고
호구법을 제정하여 호패법을 실시하였으며
환자 치료를 위해 동녀를 선발하여 부인병을 치료하게 했다.

양녕이 어린 시절을 외가에서 자란 탓에 외삼촌들과 친밀하게 지내
양녕이 왕위를 계승할 경우 자칫 외척들의 발호로 이어질까
불안감이 작용했던 태종이 양녕을 세자에서 폐하고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기에 이르는데
폐위된 양녕 대신 왕세자에 책봉되고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으니
그가 바로 조선 4대 왕 세종

세종은 태종의 셋째 아들로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야사에는 태종이 세종을 총애하고 왕위를 물려주고자 하는 말을
양녕이 엿듣게 되었고  이후 양녕은 부모를 욕되게 하지 않고
부모 마음을 편안하게 해 드리기  위해
일부러 광인의 흉내를 낸 것으로 전해진다.
양녕은 자신의 스승이 오는 날 그 앞에서 개 짖는 시늉을 하는가 하면
공부시간에 동궁 뜰에 새 덫을 만들어 새 잡기에 열중했고
조정의 하례에는 참석하지 않고 꾀병을 부리기도 했으며
궁궐을 월장해 기생을 찾는가하면 남의 집 소실을 낚아채기도 했고
심지어 여염집 처녀를 납치해 강간을 하는가 하면
기생을 몰래 동궁으로 들여 아이를 배게 만들기도 했다.
세자의 이런 패륜행각이 극을 향해 치닫게 되어
결국 왕위는 세종에게 돌아가게 된다.

세종대는 태종이 이룩해 놓은 왕권의 안정을 바탕으로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전반에 걸쳐 기틀이 확립된 되었으며
집현전을 통해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고
유교 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 제도가 정비되었다.
또한 다양하고 방대한 편찬 사업이 이루어져 문화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고
훈민정음의 보급, 농업과 과학기술의 발전,
의약기술과 음악 및 법제의 정리, 공법의 제정, 국토의 확장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민족 국가의 기틀을 확고히 다졌다.
세종은 김종서를 보내 두만강 방면에 육진을 개척하였으며
압록강 방면에는 사군을 설치하여 두만강과 압록강 이남을
조선의 영토로 편입하는 대업을 이루어 내기도 했다.
또한 이종무로 하여금 대마도를 정벌하여 왜구의 노략질을 일소시켰으며
이 밖에도 박연을 등용해서 당시까지 산만하게 흩어져 있던
아악을 정리하게 하고 금속화폐인 조선통보를 주조,
언문청을 중심으로 불서 번역 사업을 펼치기도 했다.
황희와 맹사성 두 재상은 조선 역사상 가장 평화롭고 안락한 시대로
만드는 원동력이었는데 황희는 87세로 조선 재상 중 가장 오래 살았던
사람으로 기록되었으며
천민출신인 장영실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중국에서 귀화한 아버지와 기생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장영실은 해시계의 하나인 앙부일구(솥을 떠받치고 있는 모양의
해시계란 뜻으로 마치 그 모양이 가마솥에 다리가 세 개 붙어 있는 것
같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와 물시계인 자격류를 개발하였다.

젊은 시절부터 소갈증(당뇨병)을 앓고 있던 세종이 죽고
5대 문종이 등극하였지만 원래 병약했던 탓에 재위기간 내내 대부분을
병상에서 보내야 했고 유연함과 강함을 곁들인 정책을 실시하다가
재위 2년 3개월 만에 39세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문종은 고명(임금이 신하에게 유언으로 뒷일을 부탁하는 일)을 남기고
병사하였고 그 뒤를 이어 12세 어린 나이에  6대 단종이 즉위하자
모든 정사는 의정부와 육조가 맡아서 처리하게 된다.
인사문제에 황표정사제도(인사 대상자의 이름에 황색 점을 찍어 올리면
왕은 그 점 위에 낙점하는 방식)를 썼으니
모든 정치권력은 문종의 고명을 받은 고명대신들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었고 왕권은 극도로 약화되었으며
왕권이 유명무실해지자 세종의 아들들을 중심으로
왕족 세력이 팽창하기 시작, 급기야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일으킨다.

계유정난으로 고명대신들이 거의 참살당하여 조정은
수양 대군의 수중에 들어갔고
수양은 자신의 집권거사에 참여한 인물들을 정난공신에 봉하였으며
안평대군과 그 아들 우직을 강화도로 유배 보내고 안평대군은 사사시킨다.
이징옥의 난이 무위로 끝나면서 금성대군 이하 종친 궁인 및 신하들을
죄인으로 몰아 유배시키자 이에 위험을 느낀 단종은
상왕으로 물러앉게 된다.

* 역사라는 것은 만약이라는 것을 허용하지 않지만
그래도 만약에 만약에 말이다
이징옥이 죽지 않았더라면 조선은 아시아 동부를 완전 뒤덮는
초 강대국이 되었을 터, 아라사는 국교수립을 요청해 왔을 것이고,
왜국이 감히 합병을 해?

상왕 복위 사건이 사전에 발각되어 사육신(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이 사형  당했고 단종은 영월 유배되는데
또 다시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단종은 서인으로 강봉, 사사되었다.

단종을 사사하고 수양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조선조 7대 세조
세조대에는 이시애의 난이 일어났으며 관제 개편과 관리들의 기강확립을
통해 중앙집권제를 확립하고 민생 안정책과 유화적인 외교활동을 통해
민간 생활의 편리를 꾀했으며 법전 편찬과 문화사업으로
사회를 일신시켰다.
그러나 정치 운영에서는 문치가 아닌 강권으로,
인재등용에서도 실력중심이 아닌 측근중시의 인사로 일관했기 때문에
이로 인한 병폐가 심해졌다.
이로 인해 이징옥과 이시애의 난이 발발하기도 한다.
* 이시애
이징옥을 밤 나무, 이시애를 너도 밤나무에 비유를 하곤 한다.

세조는 즉위기간 내내 단종을 죽인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전해진다.
만년엔 단종의 어머니이자 형수인 현덕왕후의 혼백에 시달려
아들 의경세자가 죽자 그녀 무덤을 파헤치는 패륜을 서슴지 않고 행했으며
현덕왕후가 자신에게 침을 뱉는 꿈을 꾸고 나서부터
피부병에 걸려 고생하기도 했다
그 피부병을 고치려고 상원사를 찾았다가 문수동자에 의해 쾌유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가난한 선비 오선덕과 관련한 이야기도 주목을 끄는데
이후 최서해의 빈궁문학(일례로 가난한 아내가 귤껍질로 허기를 달래는
내용은 오선덕의 아내가 쥐를 구워 먹는 것과 대상의 설정만 다를 뿐
전체적인 줄거리는 매우 유사하다, 본인생각에 )의 시초가 아닐까 한다.
또 이 시기 땡전 이야기가 나오는데
땡전은 땜전의 와전된 발음으로 땜전은 쪼개진 엽전을
납으로 땜질한 것을 뜻한다.

세조대에는 권람과 한명회 등이 활동했으며
특히 한명회는 노년에 권좌에서 물러나 한가로이 갈매기와 벗하며 지내고
싶다하여 정자를 짓고 자신의 호를 붙여 압구정이라 불렀지만
노년에도 부원군 자격으로 여전히 정사에 참여하여 권좌를 지켰기에
당시 백성들에게 압구정은 권력과 벗하는 곳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한명회는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폐비사건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부관참시를 당했다가 중종 때 신원되었다.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가 세자로 책봉된 지 2년 만에 시름시름 앓다가
죽자 19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예종은 모후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으로
왕권을 행사할 수 없었으며 이것이 조선왕조 최초의 수렴정정의 시작이다.
예종대에는 유자광의 계략(男兒二十未平國-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에서- 平을 得으로 고쳐 역모를 꾀하고 있다)으로
남이의 역모사건이 발생하였고
최항 등이 경국대전을 찬진하였으나 반포하지 못하고
14개월이라는 짧은 치세에다 정희왕후의 수렴청정과
원상들의 대리 서무가 이루어졌기에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 왕으로 기록되었다.

*남이장군은 태어날 때부터 5kg이 넘었고
눈빛도 형형해서 어른들도 기가 죽었다고 하며
남이섬은 원래 남섬이었던 것이 남이장군의  이름을 기리는 의미에서
남이섬이 되었다고 한다.

성종은 호패법을 폐지하여 민간에 대한 관의 가시를 줄였고
불교의 장의제도인 화장풍습을 없애버렸다
평안도와 황해도에 대대적인 목화밭을 조성하고
경상 전라도에 뽕나무 종자를 재배하게 하여 의류업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태조 이후 닦아 온 조선 왕조의 전반적 체제를 완성시켰으며
조선 개국 이래 가장 태평성대 한 세월이었다.
그러나 후기에 들어서 유흥에 빠져들었고
이것이 확산되어 사회 전반에 유흥을 즐기는 풍조가 만연해졌다.
성종은 궁을 빠져 나가 규방을 출입하기도 했고
이로 인해 윤씨가 그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는 사건이 발생 해
폐비사건으로 비화, 연산군 대에 정쟁의 불씨로 작용했고
결국 갑자사화를 일으킨다.
성종의 총애를 독차지했던 왕비 윤씨는 성종이
다른 여자와 밤을 보내는 일이 잦자
왕 주위의 후궁들을 독살할 요량으로 비상을 숨겨두었다가 발각되었다.
이 때문에 그녀는 빈으로 강등될 지경에 처하지만 성종의 배려로
강등되는 수모는 겪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급기야 만백성의 어버이인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는
사건을 일으켜 폐비 되기에 이르른다.

*갑자사화 이야기는 역사시간에 귀가 따갑도록 들은 이야기라 생략

야사에 등장하는 어우동에 관한 이야기도 성종 대 형성된 것이다.
또한 성종대에는 세조 때 편찬해 오던 경국대전이 수차의 개정 끝에
완성되어 반포되었으니 이것이 조선 시대 통치의 기본 법전으로
우리나라에 전해져 오는 법전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문헌적 가치가 대단히 크다.
문화 서적도 활발하게 편찬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조선 전기 관찬 지리지인 동국여지승람,
삼국 이후 전승된 시문들을 모아 엮은 서거정의 동문선을 비롯하여
의궤와 악보를 총 정리한 악학궤범, 신라 초에서 고려 말에 이르는
역사를 집대성한 동국통감 등이 그것이다.
*서거정은 태평한화골계전의 저자이기도 한데 태평한화골계전을 보면
양반이 계집종을 훔치는 8가지 모양에 대한 내용이 흥미롭다.
첫째, 굶주린 호랑이의 공격, 둘째, 살얼음 밟는 여우의 행보,
셋째, 껍질 벗는 강르 매미의 고통, 넷째, 도둑이리의 탈주,
다섯째, 물고기를 노리는 백로의 끈기, 여섯째 꿩을 덮치는 솔개의호전,
일곱째, 방아 찧은 옥토끼, 여덟째, 싸움닭의 명승부
김시습은 서거정의 글을 인정하지 않았다하지만
서거정의 위트 감각과 유머, 정밀한 관찰력과 표현력에 유구무언!!
* 고려 때부터 실시하던 과거제도의 폐단을
성균관 사성이었던 이형하가 정리해서 남긴 문서가 있다.
그중 8폐(과거시험도중 일어나던 8가지 악습 폐단)의 내용
차술차작 : 남의 글을 빌려 쓰는 일
수종협책 시험장에 교과서를 숨겨 들어가는 일
입문유린 : 시험장에 여럿이 같이 들어가는 일
정권분답 : 시험지를 바꾸어 내는 일
외장서입 : 답안지를 밖에서 써 내는 일
혁제공행 : 시험 문제를 미리 알게 하는 일
이졸환면출입 : 다른 이졸이 들랑거리며 커닝을 도와주는 일
자축자의환롱 : 시권을 농락하는 일
누구나 학창 시절 8가지 방법 중 한 가지 정도는 해봤음직한 방법이다.
나도 이제와 고백하지만 4번째와 유사한 방법을 사용했었다.
감독관에게 들키는 것은 어설픈 자들에게나 통하는 법
설사 들통이 나더라도 뚝 시치미 떼면 그만!!

* 시치미 어원
 처음 사냥에서 생겨난 말로 사냥 매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자기 매의 꼬리 쪽에다 쇠뿔을 얇게 깎아 만든 이름표를 달았는데,
이 이름표를 평안 북도 말로 ‘시치미’.
사람들이 주인을 잃은 매를 잡으면 이 시치미를 떼어 버리고
슬쩍 가로채는 경우가 있었는데, 시치미를 떼면
누구의 매인지 알 수 없게 된다고 하여 ‘시치미를 뗀다’라는 말이 생겼다고
으히! 이야기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렀네....
갈 길은 먼데 할 말은 많고..어쩐댜?

성종 대 무오사화가 발생하는데 김일손이 제출한 사초가 직접적인 원인
사초의 내용은 왕위를 찬탈한 사실을 비난하며 은근히 단종을 추모한
조의제문과 이극돈이 정희왕후 상중에 기생과 놀아난 내용을 비판하는
화술주시가 실려 있다는 것

성종 대 이탈리아에서는 토스카넬리가 처음으로 세계지도를 제작하였다.

성종이 죽자  왕으로 등극한 연산군
연산군은 등극하자 마자 성종이 아끼던 사슴을 활로 죽여 버렸고
세자시절 두 스승이었던 조지서와 허침이 있었는데 조지서를 죽여 버린다.
* 조지서는 깐깐하였고 툭하면 세자의 잘못을 상감에게 고해 바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허침은 언제나 웃으면서 부드럽게 타이르곤 했다.
세자는 조지서를 싫어하고 허침을 좋아하여 하루는 벽에다
"조지서는 대소인배요, 허침은 대성인"이라고 낙서를 해 놓기도 했으며
왕위에 오르자 조지서를 죽여 버린다.

조정을 장악한 연산군은 매일같이 향연을 베풀고
기생을 궁으로 끌어들였으며 심지어 여염집 아낙을 겁탈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큰어머니인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를 겁탈하는 등
자신의 친족과 상간하였으며 윤씨 폐출을 주도한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 받아 부상을 입혀 절명케 하는 등 패륜적인 행동을
끊임없이 자행하였다.
이때 궁중으로 들어온 기생들을 흥청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마음껏 떠들고 논다는 뜻의 흥청거리다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또 연산군은 환관 김처선이 직언을 한다하여
자신이 직접 활을 쏘아 죽이는 극악한 행동을 하기도 했고
김처선에 대한 증오감이 극에 달하여 모든 문서에 김처선의 處자를
사용하지 못하게 해서 절기중 하나인 처서를 조서로 고쳐 부르기도
했다고 전한다.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의 폭정이 노골화되고 광적인 양상을 띠면서
민생과 국정이 뒷전으로 밀리자 전국 각지에서 그를 축출하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 성희안와 박원종에 의해 연산군이 제거되고
정현왕후의 교지에 따라 진성대군이 근정전에서 즉위식을 거행하니
그가 조선 11대 중종

중종은 조광조의 주장에 따라 민간에 유교적 도덕관을 심기 위해
여씨향약을 전국적으로 실시하였으며 비변사를 설치를 설치하였다.
비변사는 이후에 영구적인 합좌기관으로 발전하여 군사적 기능뿐만 아니라
 정치기관의 성격도 띠게 되었고 무술을 가르치는 문학과를 설치하였으며,
편조전이나 벽력포 등의 무기를 제작하여 국방력 강화에도 노력하였으나,
 정치적 불안으로 군사기강이 무너져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조광조 개혁정치의 여파로 유교주의적 도덕 윤리가 더욱 정착되어 갔고
미신타파를 이유로 도교적 요소가 강한 소격서를 폐지하고
불교의 도승제도를 철폐하였으며 도성 안의 무당들을 단속하는 한편
절을 새롭게 짓지 못하도록 했다.
문화적으로 인쇄술의 발달과 더불어 많은 편찬 사업이 전개되었고
주자도감을 설치하여 동활자를 주조, 각종 서책이 편찬되었고
경제적으로 저화와 동전 사용을 적극 권장하고 도량형의 통일을 꾀하였다.
그러나 조광조 일파의 지나친 도학전 언행과 급진적 경향에 염증을
느끼던 차에 훈신, 척신 세력의 간언을 받아들여
그 일파를 숙청시키니  이것이 기묘사화
이후 조선 조정은 치열한 권력다툼이 전개되어
정국은 더욱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게 된다.

중종대에는 송도삼절이라 불리는 서경덕, 황진이가 풍미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특히 황진이는 당시 생불이라 불리던 지족선사를 면벽수도에서
파계시키는가 하면 벽계수라는 왕족의 콧대를 꺾어 놓기도 했고
당시 최고 은둔학자 서경덕을 유혹하다가 실패하자
그의 학문과 고고한 인품에 매료되어 사제 관계를 맺기도 했다.

중종시대 독일에서는 마르틴루터가 면죄부 판매에 항의하여
종교 혁명이 본격화 되었고 폴란드 코페르니쿠스는 지동설을 주장,
마젤란은 세계일주 여행을, 영국의 토마스 모어는 유토피아를 발표하고
네덜란드의 에라스무스는 우신예찬을 편찬했다.

조선 역대 왕들 가운데 가장 짧은 치세를 남긴 왕 인조
8개월 보름 남짓 왕위에 머물러 있다가 원인 모를 병으로 드러누워
시름시름 앓다가 후사 하나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나 버렸나
효성이 지극하였고 성품이 너그러웠으며 금욕적인 생활을 했기에
당시 사람들은 성군이라 일컬었다고 한다.
세자 시절 한번은 계모 문정왕후가 자신을 죽이려 하니
자식 된 도리로써 죽어주는 것이 효를 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인종은
조용히 불에 타죽겠다고 작정하였다.
세자의 말을 들은 빈궁은 자신 혼자 절대 나갈 수 없다고 자리를 지켜
두 사람 모두 불에 타 죽을 지경에 처했는데
밖에서 아버지 중종이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죽는 것이 문정왕후에겐 효행이 되나 부왕에겐 불충이 된다며
빈궁과 함께 불길을 헤쳐 나왔다고 한다.
심지어 자신의 이복 동생이자  문정왕후의  아들 경원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자식을 두지 않았다고 전해지는데
야사에는 문정왕후가 내놓은 독이 든 떡을 먹고 이후 시름시름 앓다가
숨을 거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인종이 죽자 12세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모후 문정왕후의
극악스러움에 눌려 평생 눈물로 왕위를 지켜야 했던 13대 명종
무오, 갑자, 기묘사화와 더불어 조선 4대 사화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을사사화가 일어난다.
*을사사화는 왕실의 외척인 대윤 윤임과 소윤 윤원형의 반목으로 일어나
소윤이 대윤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을사사화와 정미사화을 일으켜 조정을 장악한
윤원형(문정왕후의 친동생)은 자신의 애첩 정난정으로 궁중에 들여보내
주종의 아들 봉성군을 역모와 연루되었다하여 무고하여 사사시키고
많은 인물들을 희생시키니
외척 전횡 시대가 도래하였고 명종은 그들의 횡포에 시달려 눈물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언젠가 여인천하라는 tv사극에서 강수연이 정난정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회당 출연료가 당시 최고가(1000만원?) 여서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윤원형의 세도가 명종이 친정을 한 이후에도 계속되자
윤원형을 견제하기 위해 이량이라는 인물을 중용하게 되는데
이량 역시 정치를 농단하니 당시 사람들은 윤원형, 심통원, 이량을
조선의 3凶이라 불렀다고 한다.

명종시기 왕권이 땅에 떨어지고 조정 대신들이 권력을 독점하며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하자 나라 구석구석 도적 떼가 난립하였는데
양주의 백정 출신 임꺽정은 의적으로 통하던 인물이었고
이익은 성화사설에서 앞 시대의 홍길동과 후세의 장길산과 더불어
조선의 3대 도둑이라 했다.
명종시대 손꼽히는 인물로는 단연 이황을 들 수 있다.
이황의 본격적인 학구 활동은 50세 이후부터 시작되었고
그의 학풍을 이어 받은 학자로는 당대 유성룡을 비롯하여
김성일. 기대승 등을 위시하여 300여명에 달했고
이익, 이항로 등을 잇는 영남학파 사류 모두에 이르니
산이 높아야 골이 깊고, 골이 깊어야 넓은 강을 낼 수 있다는 이치는
이황에게서 나온 말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명종 사후 그를 이을 적손이 없자 중종의 서손인 하성군이
왕위(14대 선조)를 이어 받아 방계 승통 시대를 열어가니
외척 중심의 척신 정치는 종말을 고하고 사림 세력이 중용되어
붕당정치가 도래하게 된다.

선조의 비 의인왕후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조정에서는 후궁 소생 중에서
세자를 책봉해야 했는데 당시 좌의정이었던 서인의 거두 정철은
동인의 영의전 아산해의 계략에 빠져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는
내용의 발언을 하다가 선조의 진노를 사서 삭탈관직 되었다.
서인이었던 그는 동인이었던 김효원을 맹렬히 비판하기도 하지만
친하게 지내던 이이로부터 조정을 혼란시키는 정쟁을 일삼지 말라는
충고를 받고 실망하여 낙향하기도 햇다.
조정을 부름을 받아 관직에 복구하였으나 진도군수 이수의 뇌물사건으로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시 낙향하게 되는데 강원도 관찰사에 제수되자
흔쾌히 수락하엿고 이때 관동별곡과 훈민 16수를 지어
시조와 가사 문학의 대가적 기질을 발휘하게 된다.
그 뒤 전라도 관찰사, 도승지, 예조판서, 함경도 관찰사들을 지내다가
대사헌이 되었으나 또다시 동인의 탄핵을 받아 사직하고 향촌에 은거,
이 시기 굴원의 이소에 비견할 만한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등
한문과 한글로 된 가사와 수많은 시조, 한시를 창작,
국문학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긴다.
통신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을 왜국에 파견에서 동향을 살피도록 하지만
두 사람은 상반된 보고를 한다.
통신정사 황윤길은 왜국이 전쟁준비에 한창이라며 전쟁에 대비할 것을
주장하였고 통신부사 김성일은 도요토미의 인물됨이 보잘 것 없고
군사 준비가 있음을 보지 못했기에 전쟁을 준비하는 것은
민심을 혼란하게 할 뿐이라고 말한다.
결국 서인과 동인의 정치적 대결 양상으로 치달아 김성일의 주장대로
전란에 대비하지 않는 쪽으로 결론이 났고 임진왜란이 발병하자
김성일은 이일에 대한 죄를 씻기 위해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수군 이순신의 활약과 의병의 봉기. 명나라 원군에 힘입어
선조는 적의 포로가 되는 신세는 면할 수 있었고
1597년 정유재란이 발생했지만 도요토미 병사로 인해 왜군은 본국으로 철수,
선조는 전란으로 인한 피해 복구와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전력을 쏟는다
선조는 흔히 임진왜란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유약하고 우유부단한 왕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명종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외척정치를 근절시켰으며
신권 중심의 정치를 구현한 뛰어난 왕이었다.

선조는 죽으면서 대신들에게 영창대군을 돌봐달라는 유교를 남기는데
이 유언은 오히려 영창대군을 궁지로 몰아 넣어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이이첨이 이끄는 대북파가 정권을 장악하게 되는데
그들은 선조의 유교를 염두해 두고 영창대군을 경계하였다.
그러던 중 소양강을 무대로 유흥을 즐기던 서양감, 박응서 등
7명의 서출들이 역모를 꾸몄다 하여 옥에 갇히는 7서의 옥이 발생하였다.
이때 이치첨은 그들이 역모를 위해 영창대군을 옹립하고
김제남이 이를 주도했다는 진술을 유도한 후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강등시켜 유배하는 한편 김제남은 사사시킨다.
강화도에 유배된 후 영창대군을 구원해달라는 상소가 이어지지만
이이첨에 의해 영창대군은 살해 되었으니 그이 나이 아홉 살,
이후 인조 반정이 일어나 관작이 복구되었다.
정여립 모반사건
당시 활동했던 대표적인 의병장으로는
경상우도엔 홍의장군 곽재우와 정인홍
호남에서는 김천일과 고경명, 충청도에서는 조현과 승려 영규,
황해도 이정암, 평안도 승려 휴정, 함경도 정문부 등이었다.
김천일 장군의 처에 관한 이야기는 계서야담 권 3권에 실려 있는데
김천일 장군을 간혹 곽재우 장군과 혼동하기도 한다.
계서야담집은 계서 이희준이 편찬한 것으로 동야휘집, 청구야담과 함께
3대 야담집이며 모두 6권으로 되어 있다.

전란을 전후해서 민간의 생활은 처참해저 인육을 먹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고 전란 중 조정에 불평을 품고 내란을 회책하는 사레도 있었는데
송유진의 난과 이몽학의 난이 대표적인 반란 사건이다.

이시기 유럽에서는 영국의 힘이 강성해져 해상권을 장악했으며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여 인도 침탈을 강화하고
세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의 전성기였다.
또한 국문학이 고조되고 있었고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가
점차 싹을 틔우던 시기이다.

출처 : 영롱이의 독서일기 / 조선왕조실록 1부
글쓴이 : 금강하구사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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