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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영롱이의 독서일기 / 조선왕조실록 2부

보배59 2007. 1. 11. 21:38

 

조선왕조실록 2부

 

 

 

 


 

 

 

 

조선왕조실록을 읽은 지가 벌써 한 달이 넘어가고 있다.
기억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몇 줄 감상을 적어 놓으려 했던 것이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아니 좀 더 솔찍히 말하자면 엄두가 나지 않아서
오늘에서야 몇 자 적게 되었다.
기억이 나지 않는 부분이 많아 책을 다시 뒤적이다가
이 곳을 읽기나 했던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지만
아쉬운 대로 적는다.

선조는 정비가 왕비 책봉 이후 줄곧 병석에 누워 지내는 바람에
적자 소생이 없었고 14명의 아들이 있었지만 모두 서자였기 때문에
세자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로 골치를 앓았다.
더구나 선조 자신이 방계 혈통으로 왕위에 올랐다는 사실은
세자 책봉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나 분조(비상사태에 즈음하여 임시로
조정을 분리하는 일)해야 될 상황에 처하게 되자
광해군을 세자에 책봉하게 된다
하지만 명은 장자 임해군이 있다는 이유로 거절하게 된다.
- 명에서 고명이 내려와야 정식으로 세자로 확정되는 것이 상례-
이 때문에 광해군은 비록 왕으로부터 세자로 선임되기는 했지만
위치가 매우 불안정한 처지가 되었고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적자)을 낳자 상황은 더욱 악화되기 시작한다.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들은 광해군이 서자에다 차남인 까닭에
명나라의 고명을 받지 못했다고 주장하면서
광해군을 세자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이지만
선조는 사경을 헤매는 지경에 처하여 광해군에게 선위교서를 내린다.
그러나 선위교서를 받는 영의정 유영경은 공포하지 않고
자취를 감춰버리고 이후 인목대비에게 영창대군을 즉위시켜
수렴청정할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광해군을 지지하던 대북파들에게 발각되고
인목대비의 언문교지를 받아 조선 15대 왕으로 등극하게 된다.

광해군은 조정의 기풍을 바로 잡고
임란으로 파탄 지경에 이른 국가재정을 회복하는 데 전력을 기울인다.
민생 안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고 등극하자마자
선혜청을 설치하여 대동법을 실시하였고
민간의 세금구조를 일원화하여 세무 부담을 줄여 주었다.
또한 병화로 손실된 서적 간행에도 박차를 가해
용비어천가, 동국신속삼강행실도 등을 다시 간행하고
국조보감을 다시 편찬하여 정사 운영의 방향을 확립하였다.

하지만 왕권계승과정에서 계략을 부린 유영경을 유배시켜 죽이는 한편
왕권에 도전하며 위협하던 동복형 임해군을 유배시켜 죽인다.
또한 칠서의 옥이 발생하자 인목대비의 아버지(김제남)를 사사하고
선조의 적자인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전락시켜 강화에 위리안치 했다가
증살시키는 한편 계모 인목대비는 서궁에 유폐시킨다.
이로 인해 폐륜을 저질렀다는 비난을 받게 되며
인조반정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그러나 광해군을 폭정을 일삼았던 군주로 몰아가는 것은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폭정이라는 것은 원래 집권층에게 행사된 정치적 행위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민생을 위협하는 폭력적 행위를 가리키는 것인데
광해군은 일부 왕권 위협세력을 제거하긴 했으나
민간을 위협하고 학대하는 정사를 펼친 일은 거의 없었고
오히려 민생구제에 주력하여 민생 경제를 일으키는 데
전력을 쏟은 왕이었다.

연산군이 철저한 폭군이었던 것에 비해 광해군은
일부 상대주의자들과 단지 정치적 이념을 달리한 현실적인 왕이었다.
그런 점에서 인조반정을 중종반정과 대등한 관계로 설정하는 것 역시
재고되어야 한다.
더구나 중종은 반정 세력의 추대를 받은 경우지만 인조는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반정을 주도했으며
중종반정이 연산군 폐출사건이었다면
인조반정은 그야말로 반정이자 역모였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광해군 대에는 허균의 홍길동전이나 허준의 동의보감 등이 나와 문학과 의학 분야에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기도 했으며
유럽에서는 세익스피어, 세르반테스 등의 걸출한 문학가들이 사망하고
갈릴레이는 지동설을 주장한 죄로 종교재판에 회부되었다.

** 칠서의 옥
박순의 서자 박응서, 심전의 서자 심우영, 목사를 지낸 서익의 서자 서양갑, 평난공신 박충갑의 서자 박치의, 박유량의 서자 박치인, 북병사를 지낸
이제신의 서자 이경준, 서얼 허흥인 등 권력가들의 서자 7명이 일으킨
난이다.
이들은 허균, 김경손 등과 사귀면서 스스로를 죽림칠현
 또는 강변 칠우라고 칭하는 무리였다.
* 인조반정
선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당론(黨論)의 폐해를 통감하고
이를 초월하여 좋은 정치를 해보려고 애썼으나, 자신이 대북파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당론을 초월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이원익(李元翼)·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 등
명망 높은 인사를 조정의 요직에 앉혀 어진 정치를 행하려 하였으나,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 대북파의 무고로
친형 임해군(臨海君)과 이모제(異母弟)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였으며,
또 계모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유폐하는 패륜을 자행하였다.
이와 같은 광해군의 실정(失政)이 계속되어 기강이 문란해지자
서인 이귀(李貴)·김자점(金自點)·김류(金)·이괄(李适) 등은
반정(反正)을 모의, 1623년 3월 2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모든 계획을 추진하였다.

도중에 이이반(李而攽)의 누설로 탄로될 위기에 놓였으나
예정대로 거사를 단행하였다.
이서(李曙)는 장단(長湍)에서, 이중로(李重老)는 이천(伊川)에서 군사를
일으켜 홍제원(弘濟院)에서 김류의 군대와 합류하였다.
이 군대를 능양군이 친히 거느리고 이괄을 대장으로 하여
12일 밤에 창의문(彰義門)으로 진군하여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의
대응으로 반정군은 무난히 궁궐을 점령하였다.
어 왕대비(인목대비)의 윤허를 얻어 능양군(인조)이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은 의관(醫官) 안국신(安國臣)의 집에 피신하였다가 잡혀
서인(庶人)이 되었으며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대북파 이이첨·정인홍·이위경(李偉卿) 등 수십 명은 참수되었으며,
추종자 200여 명은 유배되었다.
반정에 공을 세운 이귀·김류 등 33명은 3등으로 나누어
정사공신(靖社功臣)의 호를 받고 권좌의 요직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이 논공행상(論功行賞)이 공평하지 못하다 해서 1년 후에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반정 후 남인의 이원익이 영의정에 영입됨으로써 남인도 제2의 당세를
형성하게 되었다

광해군은 제주 땅에서도 초연한 자세로 자신의 삶을 이어갔다.
자신을 데리고 다니는 별장이 상방을 차지하고 아랫방에 거쳐하는 모욕을 당하면서도 묵묵히 의연한 태도를 보였고
심부름하는 나인이 영감이라고 호칭하며 멸시해도
전혀 이에 분개하지 않고 말 한 마디 없이 굴욕을 참고 지냈다.
다시 기회가 주어질지도 모른다는 일념으로 묵묵히
희망을 안고 기다렸는지 모르지만 애석하게도 귀향생활 18년 만에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 허균은 서출(양첩소생은 서, 천첩소생은 얼)이 아닌
허엽의 두 번째 부인소생이며
매창으로 더 잘 알려진 우리 고장 부안 출신의 기생 계생을 만나서
시문을 주고받았고 천민출신 유희경과 교분을 쌓아
 인간관계의 폭을 넓혔다.
과거 시험관으로 있으면서 조카와 사위를 합격시켰다는 이유로
탄핵되어 전라도 함열에 유배되었다.
허균의 대표작인 홍길동전은 이식이 택당지 잡저부분에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었다고 기록한 것을 통해 홍길동전의 저자가 허균이라는 사실은 후대에 밝혀졌다.
허균은 홍길동전 이외 엄처사전, 손곡산인전, 장산인전, 남궁선생전, 장생전등 이른바 교산 5전이라 불리는 것을 남겼다.
* 허난설헌은 양반 출신으로 황진이와 더불어 한국 여류 문학의
양대 산맥으로 불릴 만큼 섬세하고 뛰어나 문장력을 과시했다.

인조
선조의 선위 교지를 받지 못하고 인목대비의 언문 교지로 가까스로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등극하자 자신의 불안정한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왕권 강화책을 실시하였다.
이 과정에서 임해군을 비롯하여 영창대군, 능창군과 소북파와 서인,
남인 세력들을 차례로 제거하였으며 인목대비 존칭을 폐하고
서궁에 유폐시키자 이에 불만을 품고 역모를 도모하던 세력들은
무력으로 정변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광해군의 배다른 조카 능양군이 인목대비의 교서를 받아
왕위에 오르게하니 그가 인조

반정에 성공한 인조는 그동안 득세했던 대북파들의 숙청을 단행하였고
친명사대주의를 표명하며 정국의 안정을 도모하려 했으나
이괄의 난과 청의 침입 등으로 엄청난 혼란을 겪고
결국 청과 굴욕적인 군신관계를 맺은 삼전도 치욕을 당한다.
이후 조선의 경제는 파탄지경에 이르고 민간은 굶주림에 허덕이게 된다.

그러나 인조는 화폐 사용을 위해 상평창을 설치하여
상평통보를 주조하였으며
-이 화폐는 고종에 의해 정식으로 주조 중단 명령이 내려지기까지
조선의 공식적인 법화로 활용되었다. -
청인과의 민간무역을 공인하여 북관의 회령 및 경원,
압록강변의 중강에 시장을 열었다

*이괄의 난
이괄은 인조반정 때 혁혁한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겨우 2등 공신에 책록된 데다가 평안부사 겸 부원수로 임명되어
외직으로 밀려난 것에 앙심을 품고 일으킨 변란으로
인조실록에는 기록되어 있지만
논공행상에 대한 이괄의 불만에 의해 야기된 사건이라는 것이
사관들의 통평이었다.
그러나 서인들이 세력다툼이 원인이 되어 발생한 것이라는 사실은
간과할 수 없다.
이괄의 난 이후 조정과 사회의 혼란을 일소하고자 병권을 안정시키고
민생을 구제하기 위한 노력으로 총융청, 수어청 등 새로운 군영을
설치하여 북방과 해안 방어를 보강하기도 했다.

*정묘호란
이괄의 난이 평정되자 내침을 노리던 여진족은
대대적인 조선 침략을 감행한다.
국력이 극도로 쇠약해져 있던 조선은 변변한 저항 한번 해 보지 못한 채
화의 조약을 맺어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다.
누루하치를 추대하여 후금을 세운 여진족은 광해군이 폐출되고
서인정권이 들어서면서 친명배금정책을 천명하자 조선을 공격했던 것이다.
이정구, 장유 등의 교섭진행으로 화친을 맺었으나
야인으로 배척해오던 여진족과 형제관계를 맺은 것은
힘에 밀려 패전한 입장에서 취한 치욕적인 조치였을 뿐 아니라
후금에 세폐를 바쳐야한다는 경제적 부담마저 안게 되었다.

*병자호란
병자호란 이후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서문으로 나가 한강 동편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신하의 예를 갖춘 뒤 한성으로 되돌아왔다.
이로써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었는데 이 관계는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게 패할 때까지 지속된다.
한편 청은 철군하면서 소현세자, 빈궁, 봉립대군, 인평대군 등을
볼모로 삼고 척화론자 오달제, 윤집, 홍익한을 심양으로 끌고 갔다.
또 수만에 달하는 조선 여자들을 끌고 갔는데 이들의 목적은
돈을 받고 조선에 돌려주는 것이다.
그렇지만 끌려간 여자들이 대부분 빈민출신이라
속가를 낼 입장이 못 되었다.
비싼 값을 치르고 아내나 딸을 되찾아 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되돌아온 환향녀들은 순결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아
자살을 강요받거나 노비와 도주해서 살림을 차리는 경우가 허다했으며
이혼문제가 정치, 사회문제로 대두되기도 했다.
오늘날 화냥년은 환향녀에서 유래된 것이 아닌가 한다.

효종
청은 병자호란을 종결짓고 소현세자, 봉림대군, 인평대군 등
인조의 세 아들을 볼모로 잡아가는데 그 중 셋째인 인평대군은
이듬해 돌아왔으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8년간이나
볼모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소현세자는 당시 청에 수입된 서양 문물을 대하면서
서양인들과의 접촉을 통해 새로운 문물과 사상을 익혀나간데 반해
봉림대군은 철저한 반청주의자가 되었다.
이런 점 때문에 소현세자는 장자임에도 볼구하고 인조의 감정을
사게 되었고 결국은 가슴앓이를 하다가 앓아눕게 되는데
열을 내리는 침을 맞고 3일 만에 죽게 된다.
소현세자가 죽고 봉림대군이 왕위를 이어받아 북벌론을 내세우며
국력강화에 전념하게 되니 이가 바로 효종이다.

효종은 평생을 삼전도 치욕을 되새기며 북벌에 집념하여
군비 확충에 전력을 쏟은 군주였으나 국제 정세가 호전되지 않았고
이를 뒷받침해 볼 만한 재정이 부족하여 군비보다도
현실적인 경제재건을 주장하는 조신들과 마찰을 빗기도 했다.
결국 효종은 북벌의 뜻은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18대 현종시대는 외침이 전혀 없었고 내적으로 사회가 안정을 되찾아
 비교적 평화로운 시대였다.
그러나 효종이 죽자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가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정쟁화하는 등 예론을 둘러싼 서인과 남인의 치열한 정쟁 속에
지내야 했기에 현종시대는 예론 정쟁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론 정쟁이 활발히 일어나 사회 예절이 강조됨에 따라
동성통혼을 완전히 금지시켰으며 정실이 개입될 요인을 없애기 위해
친족끼리 같은 부서에 있어서 송사를 맡거나 시험관을 맡은 것을
금지시키는 상피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다섯 가구를 하나의 통으로 묶는
마을 조직인 오가작통법을 실시하기도 했다.

네덜란드인 하멜이 하멜 표류기와 조선 국기를 발간해 조선이
유럽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숙종
남인이 대거 축출당하는 경신환국과 왕자 균의 세자 책봉을 반대하다가
서인이 제거 당하고 남인이 다시 집권하게 되는 기사환국을 비롯하여
인현왕후 복위운동을 통해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의 소론이 집권하게
되는 갑술환국, 그리고 무고의 옥 등 조선왕조를 통틀어 당파 간의
정쟁이 가장 심했던 시기이다.
끝까지 잡히지 않았던 의적 장길산 -이익이 성호사설에서 홍길동,
임꺽정과 더불어 조선의 3대 도적이라 기록-이 활동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 숙종 초기에 경신대출척(경신환국)으로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집권한다.
이 때 서인 세력은 남인을 어떻게 처벌할까를 두고
강경한 입장의 노론과 온건한 입장의 소론 두 패로 나뉘어진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소론, 노론이 크게 갈린 것은 아니고
서인으로 뭉쳐져 있었다.
그 후 인현왕후가 쫓겨나고 장희빈이 왕비에 오르게 되는
기사환국이 일어난다.
당시 서인세력들이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드세었기 때문에
숙종은 이 서인을 몰아내려고 서인출신인 인현왕후를 폐하고
장희빈을 내세우게 된다.
하지만 별 잘못도 없는 중전을 폐하고 중인출신의 여인을 중전으로
올리는 것을 신분질서가 엄격한 유교문화의 선비들이 찬성할 리가 없었다.
노론 소론을 포함한 서인 전체가 반대했고 남구만도 그 중 한 사람이었는데
당시 인현왕후 폐비를 반대하다가 유배를 가게 된다.
기사환국으로 서인은 실각하고 남인이 집권하지마자 숙종은
다시 남인세력이 커지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또다시 갑술환국을 일으켜
남인을 실각시킨다.
이 때 서인세력인 인현왕후는 복위되고 장희빈이 다시 후궁으로 강등된다.
이후로 남인은 두 번 다시 정권을 잡지 못하고
 중앙정치무대에서 사라지게 되고.
숙종은 서인들을 등용시키는데 항상 강경론으로 치우치는 노론이 아닌
온건한 소론을 대거 등용한다.

경종
희빈 장씨가 사약을 받을 당시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더니 재빠르게
달려와서 하초를 움켜주고 잡아당겨버렸고
그 때문에 세자는 기절하고 시름시름 앓으며 남성구실을 하지 못했던
경종은 어려서 생모의 죽음을 목격하고 생모에 의해 생산능력을 상실한 채 어렵게 왕위에 올라 병석에서 보냈다.
경종대에는 서양의 수총기를 모방하여 소화기를 제작하였고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밝힌 내용을 담은 남구만의 약천집이 간행 되었다.

*남구만의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이는 상기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영조
사형수에 대해서 초심, 재심, 삼심을 거치게 하는 삼복법을 엄격히
시행하도록 하여 사형에 신중을 기했다
사가에서 형벌을 가하는 것을 금지시켰고 판결을 거치지 않고 죽이는
남형과 얼굴에 칼로 문신을 새기는 경자 등의 가혹한 형벌도 금지 시켰다. 신문고제도를 부활시켜 백성의 억울한 일을 왕에게 직접 알리게 하였고
균역법을 시행하였다.
실학의 선구자로 평가되는 유형원의 반계수록, 신경준의 도로고 등이
편찬되었다.
영조는 조선 왕 중 51년 7개월이라는 기간 동안 왕위에 있음으로써
가장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던 왕으로 기록되었으며
83세로 가장 장수한 왕이었다.
영조시대 혜빈 홍씨는 남편 사도세자의 참사를 중심으로 자신의 한 많은
일생을 자서전적인 사소설체로 적은, 궁중문학의 효시인 한중록을 남겼고 안정복은 상고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역사를 다룬
동사강목을 집필하였다.

영조시대 유럽에서는 문학적으로 독일의 괴테와 레싱이 부상하고
 음악적으로는 모차르트, 바흐, 헨델, 하이든 등의 대가가 활동한다.

정조
정조의 신임을 받은 홍국영이 실권을 장악하여 삼사의 소계, 팔도의 장첩, 묘염 전랑직의 인사권 등을 모두 총괄하였고 이에 따라 백관들은 물론
8도 감사나 수령들까지 그에게 머리를 숙이게 되었고 누이 동생을
정조의 후궁이 되게 함으로써 정권을 한손에 쥐게 되었다.
모든 관리들이 그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으므로 勢道라는 말이 생겨났다.
정조는 규장각을 설치하여 인재를 모아 외척과 환관들이 역모와 횡포를
누르고 새로운 혁신정치를 펼쳤다.
규장각 외각에 검서관을 두고 박제가등의 서얼 출신 학자를 배치하여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정종 대에는 실학의 최고봉 정약용이 마과회통이라는 의학서 편찬,
보급하였고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인하여 대부분의 서학 관련자들이
사형되었지만 다산은 강진으로 유배된다.
이후 다산 초당에 머물면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심서 등을 비롯한
수많은 책들을 저술한다.
한편 북학파의 거장 박지원은 약 두 달 동안의 여행 체험기를 날짜 별로
기록한 열하일기를 비롯하여 이른바 연암 12전이라고 하는 허생전, 민옹전, 광문자전, 양반전, 김신선전, 역학대도전, 봉선학자전 등을 저술하였다
이렇듯 정조 시대는 양반, 중인, 서얼, 평민층 모두가 문화에 대한 관심을
집약시킨 문예 부흥기였고 노비의 신분 상승이 촉진되었던 시기이다.

*노비
솔거노비 : 상전의 집에서 기거하며 노동력을 직접 수탈당하는 노비
의거노비 : 상전과 따로 거처를 마련하고 상전의 토지나 국가기관의
토지를 경작하는 노비
독립노비 : 외거하면서 상전이나 소속 관사의 경제 기반과 관계없이
생활하면서 신공만 납부하는 노비

정조시대 중국의 청에서는 백련교도의 난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혼란이
일어났고 유럽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한 후 나폴레옹에 의해 혁명전쟁이 이어졌다.
미국은 독립을 쟁취하였고 문학에서는 고전주의 문학이 모색되고 있었으며
음악에서는 베토벤이 등장하여 낭만주의 음악의 도래를 예고하고 있었다.

순조
순조시대는 천주교 박해와 홍경래의 난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크고 작은 민란들이 끊이지 않았던 시기이다
홍경래의 난은 농민층의 자각을 가져왔고 조선 후기 사회의 붕괴를

가속화시킨 사건이었다.
순조대에는 조정의 요직을 안동김씨 일문이 차지해버리고 그들을 견제할
세력이 없었기에 안동김씨 일문이 요직에 앉아 한가문의 영달을 위해
갖가지 전횡과 뇌물수수를 일삼으니 공평한 인사의 기본인 과거제도가
문란해지고 매관매직이 이루어지는가 하면 정치 기강이 무너지고
 신분질서의 급속한 와해와 함께 왕조 사회의 위기가 도래하게 된다.
순조는 어린 나이에 등극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진 인재를 등용하고 형옥을 신중하게 하는 등 백성을 위한 정책 구현에 노력했다.

신유박해 이후 일당 독재인 외척 세도정치가 시작된다.
世道는 본래 세상을 바르게 다스리는 도리라는 뜻으로 중종조에 조광조
등의 사람들이 표방했던 통치ㅠ원리였으나 정조 초에 이르러
세도의 책임을 부여받은 홍국영이 조정의 대권을 위임 받아 독재를
하기 시작한 데서 변질되어 임금의 총애를 받는 신하나 외척들이
독단으로 정권을 휘두르는 것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헌종
내우외환으로 후기 조선 사회의 붕괴 조짐이 드러나던 시기이다.
순조 때부터 시작된 천주교 탄압은 헌종 대에 더욱 강화되었고 척사윤음을 반포하여 백성들에게 공식적으로 천주교를 금하는 교서를 내린다.
조선 최초의 신부 김대건이 체포되어 사교를 퍼뜨리고 국법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에 처해지고 청나라를 통해
프랑스에 답신을 보내는데 이것이 우리나라가 서양에 보낸
최초의 외교 문서이다.
헌종 시대 청나라는 영국과의 아편전쟁으로 일대 혼란을 겪게 되고
유럽에서는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생겨난 임금 노동자들을 위한
노동자협회가 결성되고 마르크스, 엥겔스에 의한 공산주의 이론이
만들어 진다.

철종(사도세자의 증손자이자 정조의 아우 은언군의 손자)
순조 대부터 시작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절정을 이루었으며
세도정치로 인한 탐관오리들의 전횡으로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해
백성들의 생활이 도탄에 빠져 있던 시기이다.
계속되는 안동 김씨 일파의 전횡에 마땅히 대항할 방법이 없었던 철종은
자연히 국사를 등한히 하고 술과 궁녀들을 가까이 하다가
결국 술과 여색에 빠지게 되어 33세 일기로 죽고 말았다.
철종 연간은 지배층에 의한 농민수탈이 절정을 이루었으며
안팎으로 변화가 휘몰아치는 격변기였다.
안으로는 삼정의 문란으로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홍수 지진 역질 등이
창궐하여 전국적으로 농민 반란의 양상이 나타났고
밖으로는 이양선의 출현과 천주교의 전래로 왕조 질서가 흔들리고 있었다. 이와 같은 내외적인 위기 상황에 대응할 만한 동학사상이
최제우에 의해 일어났다.
철종 대에는 제국주의적 침략주의가 횡행했으며
청나라는 태평천국의 난 등으로 정국이 혼란에 빠졌고
미국에서는 남북전쟁의 발발과 더불어 북군의 승리로 노예해방이 선포되어 획기적인 변혁기를 맞이하였다.
다윈의 진화론이 발표되어 세상을 충격 속에 몰아넣었는가 하면
파스퇴르의 미생물 분석 등 과학적 연구 성과들이 나타나 생활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고종
안동김씨의 60년 세도정치가 왕권을 극도로 악화시키고 그것이 사회의
혼란과 불안으로 이어졌으며 거기에 일본과 서구 열강이 조선을 압박해
오고 있던 시기이다.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고종은 몰락해가는 왕조와 풍전등화 같은
국가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수난과 고통 속에 외세에 의해 강제 퇴위당하고 만다.
또한 당색과 문벌을 초월하여 인재를 고루 등용하고 당쟁의 근거지가 된
사원을 철폐하는 한편 토색을 일삼아 주구로 전락한 탐관오리들을
처벌하고 양반과 토호의 면세 전결을 철저히 조사하여
국가 재정을 충당했다.
궁중에 특산물을 바치는 진상제도를 폐지했으며
은광산을 개발하는 것을 허용하여 경제에 도움이 되도록 했고
사회의 악습을 개선하고 복식을 간소화 했으며
양반에게도 세금을 부과하였다.
하지만 무리한 정책과 세계정세를 정확하게 읽어내지 못한 채
지나친 쇄국정책을 폄으로써 어려움에 처했고
경복궁 중건 과정에서 원납전을 징수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고종 대에는 천주교도들에 대한 지나친 박해로 병인양요가 발발하였고
이보다 앞서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통상을 요구하다가
평양군민의 화공을 불타버리는 사건이 발생하여 신미양요가 발생하였다.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자 정권은 민씨 척족이 장악했고 민씨 척족들은
 흥선대원군이 취했던 강력한 쇄국정책과 달리 안으로는 일부 세력의
대외 개방여론과 밖으로 윤요호 사건이후 무력 시위를 하고 있던 일본의
국교 요청을 받아들어 일본과 강화도에서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하게 되고
개화파와 위정척사파의 알력으로 구식 군대 폐지와 관련하여 군인들에
의해 임오군란이 일어났으며 이어서 개화파의 갑신정변이 발생하였다.
동학혁명으로 폭발되어 관군과 농민 사이의 전면전으로 발전하였으며
김홍집이 중심이 되어 내정 개혁이 단행(갑오경장) 되었고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친일세력으로 하여금 조정을 장악하게 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킨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민간에 알려지면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고
일본군에 대항하여 치열한 싸움을 전개하였다.
한편 을미사변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아관파천을 단행하여
나라의 위신은 추락하고 권익을 잃어 국권의 침해가 극심해진다.
독립협회를 비롯한 국민들이 국왕 환궁과 자주 선양을 요구하자
여론에 밀려 아관파천 후 1년 만에 환궁하여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에 올라 연호를 광무라 하였다.
이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고종에게 군사적 압력을
가해 오기 시작했고 한일협약을 강요했으며
을사보호조약 을 체결함으로써 일제 통감부에 의해 외교권을 박탈당했다.
이상설과 이준 열사 등을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에 파견하여
일본의 강제적인 보호조약 무효를 지원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영국과 일본의 방해로 수포로 돌아가고
고종은 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세력과 일본의 강요로 퇴위하게 된다.
고종은 순종에게 선위한 후 태황제로 물러났고 일제가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합병하자 이태왕으로 불리다가 6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때 전국 각지에 일본인에 의해 독살 당했다는 소문이 퍼져
민족의 의분을 자아냈으며 국상이 거행될 때 3.1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고종에 이어 순종이 즉위하긴 했지만 실질적으로 고종이
조선의 마지막 왕이나 다름없다.
체구가 작았기 때문에 녹두 장군이라 불리던 전봉준에 의해 동학 혁명을
비롯하여 각종 농민봉기가 우후죽순격으로 일어나게 되는데
이러한 농민들의 봉기는 제도적, 정치적으로 근대화를 목표로 했던
한국 역사상 최초의 시민 혁명으로 기록되고 있다.

순종
일제의 강요와 일부 친일 정객의 모략으로 왕위를 내놓게 된
고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 27대 왕이자
대한 제국 제 2대 황제로 등극한 순종
일본은 헤이그 밀사사건 이후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등극시킨다.
순종은 일본의 압력에 밀려 별다른 정치적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군대를 해산당하고 사법권을 강탈당하는 등 숱한 수모를 겪는다.
일본은 친일 매국노들을 앞세워 1910년 한일합병을 단행하고
한반도를 무력으로 강점해 버린다.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이 무너진 뒤 순종은 황제의 위치에서
왕으로 강등되어 창덕궁에 머물렀고 한 많은 생애를 마쳤다.
국장이 치러지는 날 6.10만세 운동이 일어난다.
순종시대 릴케는 말테의 수기를 간행하였고
시아의 대 문호 톨스토이가 사망했다.

 

 

 

 



 




                                     

 
출처 : 영롱이의 독서일기 / 조선왕조실록 2부
글쓴이 : 금강하구사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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