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롭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술을 못먹지만 술먹는 사람을 좋아한다.
나의 주량은 두 잔이다. 어떤 술이건 마찬가지다.(여기서 말하는 주량은 취해서 쓰러질 때까지 마시는 양이 아니다)
신기하게도 이 주량으로 가끔 술판에 앉아있으며, 이런 나를 불러주는 꾼들이 있으니 그들도 참 별종이다.
어쩌면 안주 대신으로 주둥아리나 나불거리라고 끼워 주는지도 모르는 일인데
내가 술을 몇 잔 마시거나 말을 몇마디 하거나에 상관없이
그냥 함께 있으면 편안해지는 술꾼이 있으니 그가 최종렬이다.
소문에 의하면 나보다 나이가 두어살 많다고도 하고 본인도 자기 나이를 슬며시 꺼내면서 호적에는 몇살 아래로 찍혔지만 나이가 무슨 소용이냐느니 말끝을 흐리다가 확실한 나이를 말하려는지 광주사태 때 내가 몇살이고 목포에서 뭐할 때 어쨌다는둥 내뱉는 역사를 종합해보면 분명 나보다 인생을 한두해 더 산 것이 맞고 그쯤이면 그냥저냥 말을 내려도 될 것 같은데 그는 내게 단 한 번도 혀짧은 소리를 한 적 없고 내가 보배 보배 하면서 버릇없이 구는데도 오히려 도전씨라고 부르거나 가람에서는 심지어 도전님이라 칭하는 것이 혹시나 내가 기어오르려는 것을 감지하고 미연에 방지하는 술수인 것만 같기도 하여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하는 것이나 이 생각이 그에 대한 예의가 아닌 듯하여 바로 접고 마는 것이다. 헥헥
왜 이렇게 길어 이게 문장여 뭐여... 어쩌다 술먹은 인간들이 내게 전화를 해서 헥헥거리면서 하는 말투를 흉내하여 보았다.
그는 보배20을 마신다.
대개 술꾼들이 각자가 즐겨 마시는 술이 있긴 하지만 고집스럽게 보배20 만을 외치는 그에게 단 한 번도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왜냐하면 담배 피우는 사람들이 늘 피우던 그 담배를 찾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보배를 마시는 그가 좋다.
값이 싸다는 것과
그 값에도 취할 수 있다는 이유로 보배를 찾는다고 했다.
그가 그 고백을 했을 때
우리는 참 가난하게 살았다는 것과 지금도 그렇다는 것 그래서 더 알뜰하게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나눠 마셨다.
그날 이후로 그의 별명은 보배가 되었다.
이 별명의 출처에 대해서는 말도 많고 니나 내나 다들 저작권자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원작자인 나를 앞에 두고도 어떤 놈이 말했었나 본인 스스로 헷갈리는 눈치다. 그만큼 보배 곁에는 소주 한 병으로도 흡족한 꾼들이 많다.
그는 강요하지 않아서 좋다.
술을 한 잔 따를 때마다 '자, 건배 우리의 빌어먹을 인생을 위하여'나 '먹다가 디져 버리자'를 상대에게 주지시키는 그런 류가 아닌 것이다. 상대에게 첫잔을 받은 뒤로는 스스로 잔을 채우며 조절한다. 자신이 먼저 그날의 화두를 꺼내지 않으며 오히려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말하자면 술잔은 자기중심적이면서도 분위기는 철저하게 타인배려형의 숙달된 술꾼이다.
(잠시 나갔다 와서 쓰겠습니다. 전화가 왔습니다. 꼭 뭣 좀 하려면 이렇습니다......)
그는 끝이 깔끔해서 좋다.
헤어지는 시간에 뒤돌아서서 손을 한번 흔들면 그만이다.
술먹는 시간이나 헤어지는 시간이나 꼬랑지가 늘어지는 인간들이 가끔 있는데
그의 이별은 깔끔하다못해 단호하다.
시간이 이쯤이니 그만, 주량이 다 찼으니 그만...이건 그와 나의 공통점이다.
살다보면 어쩌다 전화로까지 술을 마셔대는 사람들이 있는데
헤어지고 나서도 전화로, 오늘 즐거웠다 잘가라 사랑한다 어쩐다 이따 통화하자...새벽에 통화는 무신.
이런 류는 가끔씩 전화기에 문자로 찍히는 '오빠 쥑여줄게 꾸욱 번호만 눌러줘 공팔공 우째저째'나 '축하함다 뭣뭣 당첨 짜잔~'보다 더 짜증나는 일이며, 다시 만나고픈 맘이 생길리도 없다.
보배는 술자리가 파하기 무섭게 100미터 스프린터가 된다. 물론 세상에서 젤 무섭다는 부인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는 취한 중에도 다분히 인간적이어서 좋다. 여기서의 인간적이라는 말은, 취하면 바로 동물이 되는 사람들을 의식한 말이다.
어쩌다 일어나는 일이지만 여러사람이 모였을 때는 노래방에 갈 때가 있다. 보배나 나나 통키타 청바지 세대라서 어느정도 포크쪽으로 죽이 맞는 편인데 일단 노래방에 가면 그는 분위기에 편승하는 재주를 보인다. 그래서 좀 시끄럽고 신나는 노래 한곡 정도를 비축해 놓고 예를 차리는 것인데, 그렇다고 그가 무대를 휘젓고 방방 뜨는 것이 아니고 그 큰 눈을 껌벅거리면서 조용하면 조용한대로 맥주 한 잔을 턱에 걸고, 분위기 있게 (또는 깝깝하게) 노래하는 카수들을 측은(?)하게 봐주는 휴머니스트이다.
생각해보니 지난 6개월간을 한주도 빠짐없이 그를 만났다.
실력도 안 되는 것이 군산지역 1학년 스터디를 봐준다는 풍신으로 일을 벌였는데 고것이 생각하면 할수록 환장하고 미칠노릇이라, 요것을 누구에게 떠맡기긴 해야겠는데 사람좋고 만만한 이가 보배였던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벌써 한학기가 지났다.
보배가 홀딱 넘어간 이유는 순전히 술 때문이었다.
언젠가 기분좋게 취한 자리에서 그의 지극히 인간적인 옆구리를 살살 파고들어, 1학년 스터디를 잠시 진행해주면 어떨까 했더니 덜컥 술김에 그러마 했던 일이 학기 내내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었는데
오히려 그것이 큰 보람이고 추억이었다고 말해줘서 그것 하나만으로 그가 속깊은 사람인 것을 알았다.
후배들에게 창피할까봐 과락을 악착같이 면했다며 그동안의 마음고생을 소주 한 잔으로 털어 넣으면서 고백하는 순한 사람이다.
그의 순하디 순한 품성이 어디 그것 뿐이랴.
그가 직장에서 퇴근할 무렵 저녁일을 나간 부인에게(맞벌이 부부다)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 일단 집으로 들어갔다가 "여보 나 집에 들왔네"하고 안심 시키고 탈출한 것이 두어번... 이것은 술꾼들의 다소 색깔있는 범죄류의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않는 이른바 자상한 가장의 모션이나, 이런일도 각시한테 미안하다는 아주 투명한 술꾼인 것이다.
우리는 이상야릇한 술집에 가본 적도 없고 그럴 체질도 아니고 그럴 돈도 없다.
겨울을 기다린다.
한손엔 보배20, 한손엔 김밥집에서 산 따뜻한 국물이 담긴 비닐봉지를 들고 "왜케 뜨겁디야"하고 들어오는 그에게
"조심햐, 남자가 질질 흘리고 댕기믄 안 되지라"며 퉁명스럽게 튕, 대접을 날리는 인간이 뭐라고...
혹시 나처럼 온통 죄악에 찌든 중생을 구제하려는 일종의 사명감이 그 안에 있는건 아닌지 조심스럽게 물어볼 일이다.
나의 냉장고엔 보배가 놓고간 소주가 지금 그대로 있다. 소박한 이야기가 뚜껑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죽었다 깨어나도 섬놈인 우리는 적당한 때 적당한 이야기인 우리들의 유년을 꺼냈었다. 우리가 태어나고 자란 만재도와 개야도는 지금 씩씩거리며 냉장고 문을 부수고 나올 기세다.
'만재도와 개야도'는 그야말로 '만가지 재료가 널부러져 열리는 섬'이다.
우리의 보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