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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영롱이의 독서일기 / 왕조실록 [신라] - 2부

보배59 2007. 1. 11. 21:42

왕조실록 [신라] - 2부

 

 

 

 

 



 

 

 

통일 시대로 30대 문무왕에서부터 50대 정강왕까지를
중요 인물을 위주로 국문인의 관점에서 적는다.

태자시절 통일 전쟁에 참전하여 많은 공을 세웠던 30대 문무왕은
삼한을 통일(신라가 장악한 땅은
백제의 한반도 영토와 고구려의 일부 지역에 불과하므로
삼국 통일이라고 부른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는
박영규 견해에 따른 것임)하고 영토확장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신라가 외세를 끌어 들여 통일을 했다고 보는 시각과
우리 민족 활동 반경이 좁아졌다고 말하는 것은
민족적 개념이 형성된 고려 이후에나 가능한 사관이다.
신라에겐 고구려, 백제, 왜, 당 모두가 외세에 불과했던 것이고
국력이 약했던 신라로서는 그 어느 나라와든 연합을 해야 할 입장이었고
나름으로는 살아남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한반도 동쪽 작은 나라 신라가 북방의 맹주 고구려와 숙적 백제.
대륙의 당, 남방의 강적 왜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아
한반도 일부나마 통일을 한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은 아니었을까?

삼한 통일의 영웅 김유신은 가야 왕족의 후예로
그의 혈관에 신라인의 피가 섞이기 시작한 것은 6대조 취희왕부터이다.
취희왕의 아버지 좌지왕은 색을 좋아하여 각국의 여자를 아내로 삼았는데 그 중 신라의 차찬 도령의 딸 복수가 섞여 있었다.
복수가 아들 취희를 낳자 좌지는 그를 태자로 삼고 복수를 왕후로 삼았다. 이후 취희는 신라의 각간 지사의 딸 인덕을 맞아 질지왕을 낳았고
질자왕은 가야 연인 방원에게서 감지왕을 비롯한 다섯 형제를 두었는데
감지왕이 신라의 각간 출추의 딸 숙씨에게서 구충(구형왕)을 얻었고
구충은 가양인 계봉의 딸 계화에게서 무력과 무득을 얻었는데
무력은 진흥왕의 딸 아양을 아내로 맞아 서현을 낳았다.
서현이 바로 김유신의 아버지다
할아버지 무력이 진흥왕의 딸과 결혼하여 서현을 낳았고
아버지 서현이 진평왕의 어머니(만호태후)의 딸(만명)과 결혼(야합)하여
유신을 낳았으니 신라인의 피가 절반 이상 섞인 셈이긴 하다.

김유신은 비담의 난을 진압하면서 공신의 위치에 오른다
비담은 선덕왕이 정사를 제대로 처리하고 못하고
백성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황룡사 대탑 건립 같은 큰 공사를 벌여 민심을 잃게 하고 있다는 이유로
반란을 일으켰는데
선덕왕의 군대보다 훨씬 많았고 한밤중에 유성이 떨어지는 바람에
군의 사기가 한층 올라갔다.
바담은 별이 떨어지는 것은 여왕이 패할 징조하고 말하면서
부하들을 독려하였는데
선덕왕 역시 이 형세를 전해 듣고 불안해했다.
이때 유신이 한 가지 계략을 써서 상황을 역전시켰다.
계략인즉 유신은 다음날 밤 허수아비에 불을 붙여서 연에 매달아 띄웠는데 마치 떨어진 별이 다시 하늘로 속아오는 것 같았다.
유신은 어젯밤 떨어진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소문을 내게 하였고
그 바람에 비담의 군대는 사기가 떨어지고 선덕왕의 군대는 사기 충천하여 결국 비담의 군대를 공격하여 난이 진압되었다.
원효와 의상이라는 불교를 대표하는 두 승려가 활동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당나라 유학길에 오르던 중에 동굴에서 잠을 자다가 밤중에 목이 말라
손에 잡히는 대로 물을 마셨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해골에 고인 물
기겁을 하다가 큰 깨달음을 얻었으니 진리라는 것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 있다는 것
이후 당나라 유학길을 포기하고무애의 삶을 살던 원효는
미치광이처럼 세상을 떠돌아 다녔고
자루없는 도끼를 내게 맞춰 준다면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직을 터이다라고 외치고 다녔는데 세상사람들은 이해를 못했지만
무열왕이 이해하고 둘째딸이 전쟁에서 남편을 잃고 외롭게 요석궁에 머물러 살던
둘째딸과 원효를 맺어 주어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신라 10중 한사람인 설총이다.
문무왕시기 동로마에서는 칼리니쿠스가 화약을 발명했다.

신문왕
국학을 세워 국가 주도로 인재를 양성함으로써
지방 귀족들의 힘을 약화시키기도 했으며
신라의 3대 문장가 (최치원, 강수, 설총)가 활동한 시기이다.
대승 원효의 아들이자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의 소생인 설총은
한학에 심취하여 이두를 집대성하는 공적을 남겼다.
신문왕은 기분이 울적하면 설총을 불러
고상한 담론이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요청했는데
그때마다 설총은 고사를 들려주면서 왕도를 가르치곤 했다
신문왕은 기꺼이 설총의 가르침을 받아들였고
그가 들려준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겨
왕자들에게 가르치도록 했다고 전하니 그 대표적인 것이 화왕계
신문왕대에는 흠돌의 난을 평정한 이후 반란군의 상당수가
화랑의 무리였음을 간파하여 화랑도를 폐지한다.

효소왕
신문왕대 통일의 후유증이 거의 해소되고
정국 불안 요소들이 대부분 제거 되어 정치와 사회는 안정된 편이었으나
어린 효소왕이 즉위하자 신문왕대 공신들이 정치를 좌우하게 되었고
왕권을 되찾기 위해 대결을 벌이지만
오히려 공신 세력을 단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효소왕때부터 일본을 왜로 부르지 않고 일본으로 불렀다.

본명은 융기였으나 당나라 현종의 이름과 같다는 이유로
흥광으로 고쳐야 했던 성덕왕
성덕왕은 당에 견당사를 파견하여 선진문물을 수입했고
왕실과 귀족 자제들을 당나라 국학에 입학시켜 학문을 배워오도록 했다.
그러나 중류 귀족층의 미인을 뽑아 당나라 현종에게 바치는
굴욕적인 외교형태도 보였다.

효성왕
노자의 도덕경이 수입되었던 시기이다.
경덕왕
전문 식견을 갖춘 학자관료들을 육성하여
유교정치 구현의 토대를 형성하였고
성덕왕을 기리기 위해 신종을 만들기도 했다.
생식기가 8치 (24cm)나  되었음에도 자식은 한명밖에 두지 못했다.
이 시기 중국에서는 안녹산이 양귀비를 죽이고 현종을 촉으로 내 쫓았다.

혜공왕
지나치게 색을 탐하여 늘 음악과 여색에 빠져 지내다가
24살의 젊은 나이에 살해되었다.
선덕왕
원성왕
독서삼품과를 설치하여 학문의 깊이와 능력에 따라 벼슬을 내리는 획기적인 조치를 취했고
소성왕,
애장왕을 거쳐 조차 애장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헌덕왕
왕위에 추대되었던 형 김주원이 폭우가 내려  냇물을 건너지 못해
대신 왕위를 차지하게 되었으니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흥덕왕
당에서 구국한 사신 대렴이 차나무 종자를 가지고 와서 지리산에 심게 하여 영호남 지방을 차의 본고장으로 만든 것이 이 시기부터라고.
흥덕왕은 즉위 두 달만에 왕비가 죽자 너무 슬퍼하여
매일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
신하들이 새 왕비를 맞이하여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흥덕왕은
짝을 잃은 새도 슬픔을 간직하거늘 어찌 좋은 배필을 잃고
무정하게도 곧바로 부인을 얻는단 말이오
하면서 심지어 시녀들도 일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였고
오직 내시 두 사람만 주변에 머물도록 했다고 한다.
그 모습을 애처롭게 여긴 신하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와서
앵무새 한 쌍을 선물했는데 그만 암놈이 죽고
수놈만 홀로 남아 늘 구슬프게 울었다.
흥덕왕이 거울을 하나 구해 수놈 앵무새 앞에 놓아 주니
거울 속에 새가 제 짝인 줄 알고 거울을 쪼아보다가
그것이 저 인 줄 알고 더욱 구슬프게 울다가 그만 죽고 말았다.
앵무새를 우해 노래를 지었다고 하나 노랫말을 전하지 않는다.
희강왕
민애왕
신무왕
문성왕 해상왕 장보고가 등장하던 시기이다.
헌안왕
경문왕
왕위에 오른 뒤 계속해서 귀가 커져 당나귀 귀처럼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경문왕
임금님 귀는 당나귀 이야기는 귀는 크지만
백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을 비꼬아서
누군가 고의로 지어서 유포시킨 이야기는 아닐지
서울로부터 동해 어구에 이르기까지 집들이 총총히 늘어섰지만
단 한 채도 초가집을 볼 수 없었고
길거리에는 음악 소리가 그치지 않았으며
사철의 비바람마저 순조로웠던 헌강왕 연간
처용에 대한 기록이 관심을 끈다.
처용이 밤늦게 까지 밖에서 놀다가 집에 들어와 보니
자기 아내가 다른 남자와 자고 있었다.
그 현장을 목격한 처용이

셔블 발긔 다래                      東京明期月良                     
밤 드리 노니다가                    夜入伊遊行如何                   
드러와 자리 보곤                    入良沙寢矣見昆                   
가라리 네히어라                     脚烏伊四是良羅                
둘흔 내해엇고                       二盻隱吾下於叱古                 
둘흔 뉘해언고.                      二盻隱誰支不焉古                
본데 내해다마는                     本矣吾下是如馬於隱               
아사날 엇디하릿고                   奪叱良乙何如爲理古              

라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면서 물러 나왔다
그 노래 소리를 듣고 역병 귀신이 깜짝 놀라 처용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내 당신 아내를 탐하여 관계를 하였는데도 당신이 노하지 않으니
감격스럽고 장하오.
맹세컨대 당신의 얼굴 그림만 봐도 문안에는 들어가지 않겠소.
이후 사람들은 나쁜 귀신을 쫓아낼 때
처용의 형상을 문 앞에 그려 붙이게 되었다는 얘기
혹 본디 내 것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쩌리 라고 하는 한탄조의 마지막 구를 보면 혹 처용으로서는 도저히 어찔할 도리가 없는 상대
즉 헌강왕은 아니었을까?
당시 신라왕은 누구의 부인이든 취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으니 말이다.

정강왕
뒤를 이을 자식이 없어 누이 동생 만에게 왕위를 물려 주라는 유언을
남기고 왕위에 오른지 1년만에 생을 마감했다.

 

 

 

 

 

출처 : 영롱이의 독서일기 / 왕조실록 [신라] - 2부
글쓴이 : 금강하구사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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