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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영화 삭혀서 보기 영화를 좋아하는 모든 사람들이 영화를 즐기는 나름대로의 방법들을 가지고 있겠으나, 내 경우는 조금 특별하다고 하겠다. 요즘 영화들은 개봉하기 몇 달 전부터 떠들썩하게 메스컴을 통해서 광고를 하고, 그 덕에 몇 백만 명이 극장에 가서 영화를 봤느니, 무슨무슨 기록들을 깼느니 하는 법석들을 떠는데, 아무리 그래도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 영화가 개봉관에서 내려지고 상영관을 지날 때쯤엔 여기저기서 영화평들이 나오는데 그 정도면 영화를 안 봤어도 그 작품의 대충 윤곽을 알 수 있을 정도가 된다. 이건 볼만한 영화다 싶어도 참아야 한다. 땅속에 묻어둔 김장 김치나 장독대에 있는 간장이나 된장처럼 삭히는 것이다. 그렇게 영화를 삭히는 동안 어쩔 땐 추석이나 연말 같은 때 무슨 특집이니 해서 공중파 TV를 통해서 보는 경우도 있고, 심심해서 유선방송 채널을 돌리다 보면 언제 시작 했는지도 모를 토막 난 영화를 보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푹 삭히면서 걸러진 몇 편의 영화를, 제목조차 잊혀질 만 하면 그때야 비디오 대여점을 찾는다. 대여점 한쪽 구석에 유행 지난 물건들처럼 처박혀있는 테이프들 사이에서 이거다 싶은 영화테이프를 만났을 때는 꼭 헌책방에서 오리지널 초판본 책을 발견했을 때같이 기분이 좋다. 신간으로 나왔을 때는 대여료를 2~3000원씩 받으면서도 대여기간 1박2일을 강조했을만한 작품들도 어쩔 땐 대여료 500원에 대여기간 4박5일 같은 행운이 따를 때도 있다. TV로 보기 때문에 화면의 크기나 음향효과는 극장과 비교가 안되겠지만 최대의 장점은 반복해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진짜 마음에 드는 영화는 세 번 정도 보는데, 한번은 줄거리(이야기) 위주로 보고, 두 번째는 배경(미술), 세 번째는 음악이나 대사를 음미하는 식으로 본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재미있어서 실컷 웃었거나, 감동적이어서 몰래 눈물을 훔쳤던 몇 장면을 제외하고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는 그런 상황하고는 전혀 색다른 재미가 있는 것이다. 며칠 전 비디오대여점에서 만난 <바이센테니얼 맨>은 개봉당시에 봤으면 느끼지 못하고 지나칠 뻔한 새로운 감동을 주었다. 무슨 로봇이 인간이 되고 싶어 한다는 테이프 소개에, 기존에 많이 봤던 사람과 로봇이 합해진 사이보그 영화나 터미네이터 같은 SF류의 영화거니 생각했는데, 너무나 인간미 넘치고 감동적이며 휴머니즘 넘치는 영화여서 여기에 소개하려고 한다. <바이센테니얼 맨>은 1999년 제작하여 2000년 1월 개봉된 영화로, SF 소설의 거장 ‘아이작 아시모프’의 원작을, <미세스 다웃파이어>의 ‘크리스 콜럼버스’가 감독하고, <죽은 시인의 사회><패치 아담스>같은 휴머니즘 가득한 영화에 많이 출연한 ‘로빈 윌리암스’가 주연으로 로봇 역을 맡았다. <줄거리 훑어보기> 미국 뉴저지의 어느 집에 선물상자가 배달된다. 가장인 리처드가 가족들에게 선물한 가정부 로봇 ‘앤드로이드 114’다. 이름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작은딸의 “앤드류?” 라는 물음에 그대로 ‘앤드류’가 애칭이 된다. 청소, 설거지, 요리, 정원 가꾸기 등 모든 집안일을 다 하는데, 항상 주인에게 “봉사는 제 기쁨이죠.”라며 즐겁게 일을 한다. 주인 리처드는 앤드류에게 지능과 호기심같은 감정이 있다는 것을 알고 로봇을 제작한 ‘로보틱스사’를 찾아갔다. 하지만 제조회사에서는 그를 불량품으로 간주하여 환불이나 교환을 해주겠다고 한다. 연구용으로 분해할 것을 안 리처드는 “그를 대신할 로봇은 절대 없다”며 “기계고장을 개성으로 착각하느냐, 얼마를 원하느냐”는 제조사에, “개성에 값을 매길 순 없다”며 앤드류를 데려온다. 리처드로부터 진정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아 창작도 하고 재산도 모으는데, 어느 날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다며 자신과 같은 로봇들을 찾아 길을 떠난다. 몇 십 년을 헤매고 다니다 같은 모델의 여자로봇인 ‘갈라테아’를 만나고 그를 통해 고장난 로봇을 수리하는 루퍼트 번즈 박사를 만나, 전자두뇌만 빼고 거의 완벽한 사람의 몸으로 된다. 다시 돌아온 집에는 처음 봤을 때부터 앤드류가 좋아했던 주인집 작은아씨를 쏙 빼닮은 작은아씨의 손녀딸 ‘포샤’가 있다. 차츰 그녀를 사랑하게 되고 결혼을 하려고 의회에 결혼신청서를 내지만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당한다. 이유는 아무리 지적인 능력을 가졌다 하더라도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는 한 인간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는 번즈 박사에게 자신의 몸을 '늙어 죽도록' 프로그램 해달라고 해서, 법정 투쟁을 하는 동안 결국은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을 포기하고 사랑하는 포샤와 같이 늙어간다. 의회로부터 인간임을 인정받고 포샤와의 결혼을 승인받지만 '앤드류'는 그 소식을 듣지 못하고 200살 생일에 '포샤'의 손을 꼭 잡은 채 조용히 눈을 감는다. 상영시간 133분의 긴 내용을 다 말하기도 어렵지만 앞으로 이 영화를 볼 사람들의 감동을 방해하면 안 되겠기에 그들의 몫으로 남겨놔야겠다. 요즘 줄기세포 문제로 전 세계가 시끄럽다. 그들의 주장대로만 된다면 난치병도, 불치병도 없어져서 인간의 수명을 120~150년까지 늘릴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죽지 않고 목숨만 붙어서 150년을 산다고 과연 얼마나 인간다우며 얼마나 행복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서든지 오래 살아보려고 애쓰는 사람들과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을 포기하고 인간답게 죽어간 '로봇' 중에 어떤 쪽이 더 인간다운지...... 영화가 끝나고 ‘셀린 디온’의 OST 뮤직비디오 <Then you look at me>가 다 끝날 때까지 가슴 한 쪽의 짠한 느낌은, 몇 번씩 반복해서 보며 메모를 해놓았던 명대사들을 다시 떠오르게 한다. <명대사 음미하기> 여기 그 명대사들을 소개하며 다시 한 번 그 장면의 감동을 느껴보고 싶다. (로봇 제작회사에서) 리처드; “그를 대신할 로봇은 절대 없어요.” 로보틱스사; “기계 고장을 개성으로 착각하는군요. 겨우 가전제품 따윌 사람 대 하듯 하니 말예요.” 리처드; “개성에 값을 매길 순 없소.” 리처드; “인간은 시간의 지배를 받지만 넌 우리와 완전히 달라. 네게 시간은 영원해” (작은 딸을 시집보낸 후) 리처드; “자식들이 다 떠났어, 모든 건 변해, 누구나 한번쯤 겪는 일인데 오 늘 새삼 깨달았어, 애들이 보고 싶을 거야.” (자유를 달라며) 앤드류; “인간의 역사를 통틀어 수백만의 사람들이 죽음을 불사하고 쟁취하려 한 것은 자유에요. 너무나 소중한 것, 전 자유를 원해요.” 리처드; “집을 떠나라. 자유의 대가는 쓴 법이야.” (인조피부이식 수술을 하며) 루퍼트박사; “이 기술의 핵심은 불완전성에 있죠. 주름살이나 덧니, 희미한 곰보 자국 등 이런 세밀한 특징들이 조화돼야만 당신만의 개성을 창조할 수 있죠. 불완전성이 우릴 특별하게 해주고 있죠.” (작은아씨가 죽는 순간 포샤의 눈물을 보며) 앤드류; “울 수 없다는 건 잔인한거야. 이 슬픔을 표현할 길이 없어. 내가 사 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말겠지” (중추신경을 살려주며) 루퍼트박사; “어떤 것은 매우 미묘하고, 멋지고, 감미롭고, 의미심장하지만, 어떤 건 괴로워서 참기 힘들 거야.” 포샤; “바꿔, 바꿔요. 겉모습만 말고 속마음 말예요. 모험을 하고 실수도 해요.” (포샤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앤드류;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이 눈부시고 그 사람과 있으면 너무나 포근해. 자신을 속이지 마.” (법정에서) 앤드류; “영원히 기계로 사느니 인간으로 죽고 싶습니다.” “인정받기 위해서죠. 제가 누구인가에 대해 있는 그대로, 찬사나 평 가가 아니라 단순한 진실을 인정받는 것. 이것이 제 목표입니다. 그 걸 이루기 위해 택했습니다. 고귀하게 죽는 길을…….” (의회의 마지막 선고);"2005년 4월 3일 가동돼 몇시간 후면 200세가 됩니다. 이로써 '앤드류 마틴'은 인류 역사상 최고령 인간으로 기록될 겁니다. 본 법정은 그가 인간임을 인정하며 '포샤 차니'와의 결혼을 승인합니다. 사나운 겨울 날씨 때문에 꼼짝도 못하는 오늘같은 날은 그동안 보고싶었던 책을 읽는 것도 좋겠지만, 나는 따뜻한 안방에서 보배20 한 병 옆에 놓고 잘 삭힌 영화나 한 편 이리저리 뒤적여 보고싶다. | ||||||||||||||||||
최종 수정 시각 : 2006.01.09 12:57:33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