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절주절

만해 한용운

보배59 2007. 2. 22. 21:47

                  만해 한용운 생가 터에 있는 안내장 내용

 

 

 

  한용운은 1879년 8월 29일(음 7.12), 한응준과 온양인 방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결성면 성곡리 박철동에서 출생 하였다.

 

  1885년 아버지를 따라 홍성읍 남문동으로 이사한 것은 당시 7세 때의 일이고 9세 때에 『기삼백주』와『서상기』를 읽을 수 있었을 정도로 어려서부터 천재니 신동이니 하는 평이 있었다.

 

  1892년 13세에 홍성읍 학계리에 사는 전영주의 셋째 딸 정숙과 결혼하였다.

 

  1896년 김복한, 이설 등이 일으킨 을미 홍주의병에 가담하였다가 의거가 실패하자 1897년 집을 떠나 설악산 오세암 등지를 전전하였다.

 

  이후 시베리아와 만주를 주유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수개월간 머물다 1904년 백담사로 출가하였다. 백담사에 갔을 때 첫 아들 보국이 출생하였다.

 

  1905년 백담사에서 김연곡화상에게서 견성득도를 하였으며, 이름을 고쳐 법명을 용운이라 하고 호를 만해라하였다.

 

  1908년 일본 동경에 건너가 각지를 돌아다니며 외국의 문물을 살피고, 우리나라 유학생들과도 사귈 기회를 가졌는데 이때 최린과 특별한 교분을 갖게 되었다.

 

  1911년 조선총독부는 조선사찰령을 공포하고 우리나라의 불교를 일본 불교에 예속시키는 동시에 사찰에 대한 권리를 장악하려 하였다.

 

  한용운은 박한영등과 손을 잡고 반대 운동을 벌여 이를 분쇄하는 한편 불교의 유신론을 제창하고 불교대전을 제정하여 불교의 대동단결을 호소하였다. 1918년에는 월간잡지 『유심』을 발간하기 시작하였다.

 

  1919년 일본에 있는 우리 유학생들이 2월 8일 독립선언을 한데 이어 국내에서도 손병희, 최린 등 33인의 민족대표로 독립을 선언하는데 주동적 활동을 하였다.

 

  그는 선언서에 공약삼장을 첨거하였고, 명월관 지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변호인과 사식, 보석을 거부하고 3년의 형기를 마치는 중에 옥중에서 ‘조선독립의 서’를 써 독립선언서와 같이 쌍벽을 이루는 명문을 남겼다.

 

  1926년에 다시 설악산에 들어가 『님의 침묵』이라는 88편으로 된 시집을 발간하여 저항문학에도 앞장섰다.1927년 신간회를 조직하여 집행위원 겸 경성지부장에 선임되었고, 1931년에는 『 불교』라는 월간잡지사에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33년 보령출생의 유숙원과 재혼하였고 다음해 딸 영숙이 태어났다. 1935년 장편소설 ‘흑풍’을 조선일보에, 1936년 ‘후회’라는 장편소설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였다. 1938년 불교계의 지하 독립운동 단체인 만당사건으로 투옥되었다.

 

  1943년 일제가 우리의 청년 학도들을 학도병이나 지원병으로 데려가는 것을 반대하였고 배급 쌀을 받지 않았다.

 

  1944년 6월 29일(음 5.9) 심우장에서 영양실조로 입적하였고 묘지는 망우리 정상에 유씨와 같이 싸봉으로 안장되었다. (세수 66세, 법랍 39세)

 

  만해 한용운은 전 생애를 통하여 일제와의 추호의 타협도 없었고 청빈한 생활을 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작품으로는 상기 장편 외에 장편소설인 <박명>이 있고, 저서로는 시집 <님의 침묵>을 비롯하여 <조선불교유신론>, <십현담주해>, <불교대전>, <불교와 고려제왕> 등이 있다.

 

  1973년 <한용운전집>, 6권이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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