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게 하기의 아름다움 제3강
내가 아닌 것은 연줄을 끊듯 버려라
어느 스승이 거문고를 앞에 두고 제자한테 물었습니다. 줄을 너무 당기니까 어떻느냐고 했더니 줄이 끊어집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너무 느슨하게 하면 어떻더냐고 했더니 음이 잘 나지 않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문학 지망생들이나 등단한
신인들은 가오리연처럼 너무 빨리, 높이 올라가려고 하고 오래 견딜 줄을 모릅니다. 시대가 너무 급변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짧은 시간 내에 많은
시를 써서 등단하려 하고 빨리 시집을 내서 유명해졌으면 하는 욕구가 강합니다. 하지만 시라는 것은 잡초 전략도 아니고 흥부전략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아이디어를 쫓아가서 되는 것도 아니고 유행을 따라간다고 해서 시가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러니까 자기 삶에서 체득을 해야
됩니다. 누구도 시를 써주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자기의 경험도 중요하고 평소의 마음 씀씀이도 중요하다는 게 누구나 시를 쓸 수는 있지만
아무나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의 시에 임하는 태도가 매우 중요합니다. 좀 느리고 좀 미흡하더라도 나는
나여야 합니다. 내가 남이 아니잖습니까.
나는 하나밖에 없는데 그런 나의 개성을 버리고 괜찮다 싶은 것을 닮으려고 하면
그건 벌써 이미 자기가 아닙니다. 자기가 아닌 사람이 시를 써놓으면 좋은 시가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아닌 것은 따라가지 말고 버릴 것은 버리는
게 좋습니다. 연도 잘 날다가도 어느 순간 줄이 끊어져서 얼레를 떠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미련 없이 떠나 보내야 합니다. 그걸 찾으려고
하지 마세요.
시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던 언어들도 어느 땐가는 나와 맞지를 않습니다. 그럴 때는 자꾸
거리에 매달리지 말고 미련 없이 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버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버린다는 것은 자기 안으로 단단해진다는 겁니다.
단단해진다는 것은 어떤 외부의 조건이 닥쳐도 견뎌낼 힘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견뎌낼 힘이 있다면 방패연과 같은 좋은
시를 쓸 수 있게 됩니다. 이런 것은 아주 평범한 것 같아도 중요한 일입니다.
독자의 관심은 시를 쓰는 사람이 아니고 시 자체입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인을 만나보고 싶지만 그 시인의 시가 별로 아니면 시인도 만나보고 싶지 않거든요. 그런데도 요즘의 시들은 너무
바깥에 민감합니다. 말하자면 자기 자신이나 세계에 대해서 새로운 인식도 없이 아주 포즈에 능한 시들이 많습니다. 다변과 요술을 문학적 열정과
혼동하는 시들이 있습니다. 문맥이 잘 안 통하는 시들이 있는가 하면, 전혀 해독이 불가능한 시들이 있습니다. 이름만 덮으면 누구의 시인지도
모르게 비슷비슷한 시들이 있습니다. '아, 이런 시들은 안 되겠다'는 생각과 함께 나 자신 그런 시들을 보면서 거울처럼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어느 평자가 이런 말에 크게 공감을 했습니다. 이렇게 감동은커녕 공감조차 할 수 없는 시들이 양산되면 너무 위험합니다. 시 독자들이 그렇게
많지도 않은데 자꾸 수가 줄어들지 않겠습니까. 시도 매력이 있어야 합니다. 시 독자 수도 줄어들고 그 동안 시인한테 갖고 있던 기대나 관심조차도
줄어들게 되면 참 안되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독자들을 걱정하기 전에 시인들 자신이 그 치열성을 놓지 말아야 된다고 생각됩니다.
여러분도 앞으로 시를 쓰실 분들이 많은 것 같은데, 그걸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요즘 시의 위기를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80년대를 시의 시대라 하고 90년대를 시의 소멸 시대라고 하잖아요. 나는 그런 표현이 좀 지나치다고 생각됩니다. 소멸이나 쇠퇴라는
말을 쓰기에는 90년대 시가 80년대 시에 결코 뒤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독자들이 시를 외면하고 있고 고립시킨다고 하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종이책이 줄어들고 전자책이 나온다고 해도 종이책은 종이책 나름대로 소중함을 갖고 있을 테니 그렇게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이
세상의 문명이 디지털화되면 될수록 시의 세계는 자꾸 서정성을 회복합니다. 시라는 게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게 따라간다고 해서 좋은 시가 아닙니다.
우리의 전통 없이 어떤 실험시가 있겠습니까. 전통이 바탕이 되는 그런 실험시가 제대로 실험시가 되지 전통을 완전히 무시해버리면, 농부들이 그렇게
잘 가꾸어 온 밭에 형편없는 씨를 뿌려서 완전히 농사를 망치는 그런 실험시들은 실험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시의 위기라고 말하는 것
중에 신춘문예에 응모자 수가 날로 늘어가고 문예지의 응모자 수도 늘어갑니다.
각종 문예 창작 학교의 프로그램들이 굉장히
활성화되고 있습니다. 시집이 줄어든다고 해도 많이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위기가 아닌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뭐가 더 위기냐
하면 많이 양산되고 프로그램들이 많이 나오는 것은 좋습니다만 시인을 양산하게 되면 치열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 치열성을 잃어버릴 경우에
매너리즘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정신적 공황이 생기게 됩니다. 그럴 경우에 오히려 위기가 아닐까, 청소년들의 왜곡된 시 교육이 대학생이
되어도 마찬가지고 어른이 되어도 시에 대해서 가까이 갈 수가 없습니다.
어느 날 TV를 보고있는데 수능시험에 대비한
국어시간이었습니다. 어떤 시인의 시를 강의하고 있었는데 전문은 살짝 한번 보여준 다음, 시 한 구절 한 구절을 해체시키고 분석하고 있었습니다.
분석하더니 상징이 어떻고 비유가 어떻고 도치가 어떻고 난도질을 하는 겁니다. 그러더니 시 한 편은 어디로 가고 없고 아주 쓸모없는 수사만
남발되었습니다. 그걸 보면서 너무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런 왜곡된 시 교육을 하니 어떻게 우리 청소년들이 시를 제대로 느끼고 이해하고 시를
가까이 하고 사랑할 수 있겠는가 말입니다. 우리 나라의 입시제도에 정말 분통이 터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걸 없앨까, 위기라고 하지만
경제위기만 위기겠습니까. 문화위기가 나는 더 큰 위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프랑스와 같은 나라에서는 유치원에서부터 시를 들려준답니다. 학년이
높아갈수록 시를 자꾸 이해시켜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는 거의 100편을 외운다고 합니다. 그냥 외우는 게 아니고 자기의 가슴 속에 들어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나라같이 시를 획일화시키고 분석하는 나라가 어디에 있습니까. 미국의 엠허스터라는 대학이 있는데
문학창작이 유일한 필수 과목이라고 합니다. 그 교육 이념이 뭐냐고 하면 종합 사고력을 갖춘 지성인을 양성한다는 것입니다. 국가 경쟁력이 그
학교에서는 문학, 철학, 자연과학에서 나온다고 굳게 믿고 있는 학교랍니다. 그래서 1,600명밖에 안 되는 초미니 학교인데도 미국 전체
인문과학대학에서 1등 자리를 몇 년간 고수하고 있답니다. 이 창작강의를 패스하려고 과외공부까지 한답니다. 일본에도 자매학교가 있다고 하는데 우리
나라는 언제 이런 학교가 생기겠습니까. 맨 일류학교만 생각하다가 언제 제대로 된 훌륭한 시인 작가가 배출되겠습니까. 정말 통탄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인데 개인의 힘이 미약하니까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참 분통이 터집니다.
강사 천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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