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어떻게 읽고 감상할 것인가.
-한국문화복지협의회. 문화 예술 자원 봉사자교육- (2003. 12,2)
이 병 창 (시인. 민족문학작가회의 )
인간이 지구방문 동안 풀어야할 3대 명제가 있다면 ‘공간, 시간 인간’을 들 수 있다. 세 단어가 모두 사이 간 자를 사용하고 있는 데 바로 여기에 깊은 비밀이 깃들어 있다. 공간이란 존재와 존재의 빈 사이요, 시간이란 그 빈 공간을 이어 주고 채워 주고 도약하게 하는 의미가 깃들어 있다(때는 닿다, 잇다, 에 어원을 두고 있다) 인간은 그 대상이 누구이든지(신, 인간, 자연....) 그 대상과 살아 있는 만남의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자기의 공간과 시간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할 책임이 있다. 오늘의 주제 역시 이런 관점에서 풀어 보기로 하자.
!. 공간과 다양성으로서의 시 이해
늘 흐르는 물처럼 사는 것이 인생을 제대로 사는 비결이라고 노자는 그의 도덕경에서 말했다. 물질계에서 액체, 기체, 고체를 넘나드는 물은 본질은 변하지 않으면서도 때와 장소와 위치에 따라 변용의 묘를 보여주고 있다. 노자는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자기 집착에서 벗어나 물의 지혜를 얻어야함을 설파하고 있다.
물
나는 태어나 본 적이 없소
태초의 하늘을 떠돌다가 오늘은
이승의 우물물로 고여있다 해도
나는 한번도 태어나본 적이 없소
흘러가는 시냇물
파도치는 바다에서
나는 나로 춤을 추고 있었을 뿐
나는 나이를 먹어본 적도 없소
나는 어떤 추억도 없이
여기에서 여기로 흐르고 있을 뿐
꽃샘바람과 함께 흩날리는
봄눈과 함께 나는
하늘에서 땅으로
땅에서 하나의 흐름으로 돌아가고
있을 뿐
나는 어느 하늘 어느 땅에서도
머물러본 적이 없소
나는 이전에 누구를 만난 적도 없소
한 점의 후회도 없이
나는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나로
지금 흘러가고 있을 뿐.
최근 과학이 발전하면서 물의 신비 또한 새롭게 밝혀지고 있다. 물은 인간의 마음과 의식에 반응하면서 물분자가 바뀌어지는 단순한 물질 그 이상의 존재임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또한 물의 흐름을 관찰해 보면 주전자나 수돗물에서 떨어지는 물이 새끼줄처럼 꼬여져 떨어지고 하수구의 경우는 소용돌이 형태로 두세 개의 물줄기가 서로 감고 밀어 당기면서 나아감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소용돌이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공간이 있어야만 한다. 물이 가득 담긴 그릇을 휘저으면 꽈배기가 형성이 되지 않고 반쯤 담긴 물을 휘저으면 소용돌이가 생기는 것이다. 공간이 없으면 서로를 북돋아 주는 힘이 형성되지 않는 물의 이치는 마주 중요한 삶의 지혜를 우리에게 암시해 주고 있다.
슈타이너 연구소의 랄프 마리넬리는 혈액의 움직임 또한 공간으로 인해 구별되어진 두 개의 혈액 흐름이 소용돌이를 이룰 때 말초혈관 까지 도달하는 힘을 얻게 된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 밝혀낸 바 있다. 심장의 펌프질만으로는 손끝 발끝까지 혈액을 보낼 수 없다. 혈액은 혈액의 흐름 그 자체에서 에너지를 발생시키기 때문에 말초혈관 까지 가게 된다는 것이다. 만약 혈관 벽에 콜레스톨이 붙어서 공간을 잠식해 간다면 그 결과는 뻔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공간의 의미는 존재계의 문제들을 풀어 가는 기초중에 기초이다.
공간이란 말 그대로 ‘빈 사이’ 이다. 모든 존재와 존재의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사람과 사람, 산과 산, 나무와 나무, 나무에도 가지와 가지, 잎과 잎 사이에 공간이 있다. 만약 공간이 없다면 존재가 존재 할 수 없는 것이다. 생명의 다양성은 공간을 전제한 말이고 사랑이란 말 역시 상대의 공간을 인정해 주는 데서 출발한다. 상대방의 공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랑이란 사실 집착의 투사에 다름 아님을 칼릴 지브란은 그의 예언자에서 노래하고 있다.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그보다 너희 혼과 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 두라.
서로의 잔을 채워 주되 한쪽의 잔만을 마시지 말라.
서로의 빵을 주되 한쪽의 빵만을 먹지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서로는 혼자 있게 하라.
마치 현악기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줄은 서로 혼자이듯이.
서로 가슴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가슴속에 묶어 두지는 말라.
오직 큰 생명의 손길만이 너희의 가슴을 간직할 수 있다.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다.
- 칼릴 지브란, <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
공간이란 현상세계뿐만 아니라 정신세계에도 존재한다. 공간 안에 만물이 존재하는 것처럼 인간의 의식 형성 역시 공간이 필요하다. 하늘과 땅, 산과 바다, 나무와 바위를 바라 볼 때 각자의 대상은 서로 다른 이미지로 우리의 의식 안에서 떠오른다. 서로 다른 이미지의 차이 때문에 그 차이를 구별 할 수 있는 생각과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런 작용은 인간의 의식 안에 이른바 내면의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이 공간을 무한히 확장해 가는 과정 가운데서 인간의식의 성숙과 진보가 있다. 의식의 진화 과정을 통하여 인간은 하나의 사물을 바라보는 데 있어서도 매우 다양하고 심층적인 눈을 열어 왔다. 사물이건 사람이건 , 아니면 신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다양한 관점(point, angle)으로 보게 되었고 이러한 과정은 인류가 생존하는 한 지속될 것이다. 미술이나 시나 종교와 철학이나 모든 정신활동은 관점의 다양성을 추구해온 업적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만큼 보고 본만큼 느끼고 느낀 만큼 표현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만약 보는 눈이 달라진다면 표현 역시 달라 질 수밖에 없다. 인간의 변화 역시 보이는 눈이 달라 졌다면 그는 확실한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누에는 뽕만 보이고 뽕 생각만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꿀과 이슬이 보이기 시작했다면 그는 이미 나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본다(See)는 것은 인간 경험의 통로이면서 인간의식의 수준을 결정짓는 핵심이다. 시나 그림이 있다면 그 작품은 그 작가의 안목만큼 표현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감상하는 사람 역시 마찬가지이다. 작가와 감상자의 수준이 엄청나게 차이가 날 때 오해와 폭력이 난무하게 된다. 고호처럼 시대를 앞서간 사람들의 경우, 눈먼 자들이 눈 뜬 사람을 비난하고 욕보이는 비극을 천박한 인류의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한 침대에 누워 있다고 해서 함께 있는 것이 아닌 경우가 있듯이 한 시대를 살아간다고 해서 동시대를 살아간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진정한 하늘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 구름을 하늘로 알고 살아 갈 수밖에 없다. 서사시 금강의 시인 신동엽은 본다고 해서 똑 같이 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의 시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에서 노래하고 있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항아리.
아침 저녁
네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畏敬)을
알리라
아침 저녁
네 머리 위 쇠항아릴 찢고
티없이 맑은 구원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憐憫)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모아리며.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 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시인은 한 대상의 공간을 파악하는 사람이다. 수맥을 찾아 들어가는 시추기처럼 존재의 깊이에 숨어있는 진실의 공간을 탐색하는 사람이다.
시인
눈빛이 머무는 곳마다
모든 사물의 하늘을 열어주는 사람
자비로운 젖가슴으로 그 하늘을
안아주는 사람
허공을 날아가는 화살도 알고 보면
날아가지 않고 있음을 ,
떨어지는 낙엽도
사실은 떨어지지 않고 있음을
볼 수 있는 사람
이승의 탄식 소리를 바라보며
하늘의 울음을 대신
울어주는 사람
그대.
공간은 말 그대로 '빈 사이'일 뿐이다. 그러므로 공간 그 자체의 구별이나 차별은 없다. 다만 그 없음에서 모든 있음이 존재하고 있음의 세계는 수많은 다양성과 역동성이 있지만 없음의 세계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신비로울 뿐이다. 즉 공즉시색이다.
태풍의 눈이 고요한 것처럼 우리의 내면에서도 그러한 일이 가능하다. 온갖 감정의 일렁임과 광기의 바람이 일어날 때조차 우리 영혼의 지성소에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의 기본 과제는 보이는 공간과 보여지지 않는 의식의 공간을 함께 공유해야 한다. 보여지는 세계의 땅 평수만 헤아릴 일이 아니라 내 의식의 지평을 여는 일은 더욱 중요하다 . 보여지는 공간의식(중심점이 하나)이 깨어질 때 그는 바로 ‘여기’(일체가 중심)의 세계를 볼 수 있다.
그대에게
그리워는 해도
염려하지는 않겠소
손 시린 세상의 능선 길을 걸어가는
그대의 뒷모습에서
흐르는 외로움이 발자국마다
고여 있다 해도
나는 그대를 염려하지 않겠소
여기에서 보면
그대의 먹구름 위에는
늘 환히 비추는 햇살이
빛나고 있소
여기에서 보면
그대의 가슴속에서 퍼덕이는
날개 짓 소리가 들려 오고 있소
여기에서 보면
그대의 하늘은 눈물겹게 푸르기만 하오
여기에서 보면.
어머니
이건 아니야
이건 나로 사는 게 아니야 하고
머리를 흔들 때
당신은 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오늘처럼
내 가슴의 산천들이 깨어날 때
늘 예배당의 마루를 눈물로 적셔 온
당신의 눈물이
내 열병의 이마 위에 뿌려지고 있습니다.
당신의 길은 너무나도
좁은 길이었습니다.
한 곡조의 선율이 지나가고
또 다른 선율의 음률이 이어지듯
그렇게 이어져 온 파란의 세월 속에서
어머니
당신의 주름은 깊기만 합니다.
나는 당신의 자궁처럼 좁은
그 길을 통해서
오늘 이렇게 여기 있습니다.
그 어느 곳도 아닌 여기
눈물과 탄식과 죽음을 넘어선 자리
내가 당신을 낳아 주는 자리
그리하여 당신은 나의 딸이 되고
영원한 누이가 되는 자리
지금 여기에서
홀로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2. 의식의 도약 연습 - 바라 봄에서 되어 봄으로
하나의 언어도 사전적 의미, 예술적 의미, 종교적 의미에 따라 그 뜻이 춤을 춘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의식이나 느낌 역시 바라보는 자의 눈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하나의 사물도 구경하듯이 바라볼 수도 있고 그 대상과 하나되어 대화를 나눌 수도 있다. 사물을 바라 볼 뿐 만 아니라 소리까지 바라 볼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觀世音)
매미 소리 속에 매미가 있다
경기전의 느티나무 등걸에서
자기 껍질을 벗고 나온 매미
온 몸을 비워 내지르는
매미 소리 속에 매미가 있다.
오늘 나는 어떤 매미가 되고 있는 건가
어떤 껍질 벗은 소리가 되어
여기에 앉아 있는 건가
제 무게로 떨어지는 낙엽은
바람을 일으키고
떨어진 나뭇잎이 한줄기 바람에
굴러가고 있다.
사람들은 자유롭기를 원하고 행복을 추구한다고 하면서도 적당하게 원할 뿐이지 진실로 원하지는 않는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자유와 행복으로 가는 길에 있어 최대의 걸림돌은 자기 자신이다. 자신에 대한 실상과 직면하는 것을 인간들이 얼마나 두려워하고 피하고 있는 가를 필자는 날마다 실감하고 있다. 눈만 뜨면 빛이 보일텐데 결코 눈을 뜨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현재의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바라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얼마나 나 자신을 두려워하고 무시하고 정죄하고 혼돈에 빠져있는가를 바라보는 데서 인간의 길은 출발해야한다.
바라보기 수련은 모든 수행에 있어 첫 단추와 같다. 석가는 제자들에게 수행의 요점을 밝힌 팔정도에서 바라보기(正見)를 첫째로 꼽고 있고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한 다음 교회가 황제의 권력구조 안에 귀속될 때 영성의 최대위기를 감지하고 사막으로 떠났던 교부들 역시 바라보기 수련을 가장 핵심으로 삼고 있다. 영적인 길의 대부분은 피안의 세계에 대한 경험이 아니라 자신의 몸과 생각과 감정의 흐름을 믿음의 눈으로 순간순간 파악하고 잘 다루어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내적 고요와 평정을 이루는데 있다. 이 부동심(맹자)의 마음이 청결한 마음이요, 건강한 마음이다. 몸과 맘이 하나되는 뫔의 상태요, 나 자신과 바라보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사랑의 상태이다.
감성이 예민한 시인들은 시적 대상과의 일치를 이루는 교감을 노래하고 있다. 고호가 별보다 더 높이 자라고 싶은 나무들의 마음을 그려내듯이 시인들도 시적 대상의 마음과 교통하는 데 익숙하다. 시를 이해하고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점에 대한 이해와 연습이 필요하다.
아들에게
잘 익은 석양 한번 만나고 오라
능선으로 올라가라 했더니
오늘 바라본 노을은
진홍빛이었다고 만 말하는구나.
그것뿐이었더냐
셀 수 없는 하늘 빛깔 중에
너는 오직 하나의 색깔과 느낌을
선택했을 뿐.
바쁜 호흡으로 다녀온 너의 걸음에는
어떤 만남도 보이지 않는구나.
아들아
바라본 다는 것은 임무완수가
아니란다.
조금만 더 햇빛이 네 손등에
닿는 것을 보았더라면
마음껏 바람을 허락하는
구름을 바라볼 수 있었다면
때로는 지는 노을이
너의 살도 되고 피도 될 수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
너의 망막 속에 비쳐진 진홍 빛
그 너머 너머에서 지고 있는
너의 노을을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대에게(2)
내가 이 세상에 와서 배운 것은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는 일이오
숨을 고르고 또 고르면서
바라보는 일이오
그렇게 바라보면 구르는 돌맹이도
함부로 구르는 법이 없었오
슬픔도 슬픔이 아니고
고통 또한 고통이 아니었소.
한 모금의 찻물 속에도
물과 다기와 함께 나누는 사람에 따라
춤추는 맛의 비밀이 숨어 있듯이
가을 강물과
해부 당하는 닭의 몸통 속에서도
나의 하늘이 있었소
인간의 어떤 기대와 욕망보다도
더 깊은 하늘이.
나는 그 하늘에서 울고 계신
하느님을 보았소
오늘도 아프리카의 한 모퉁이
케냐의 카바넷에서
내 눈물에 젖고 계신 그분을.
그 하늘을 나는 함께 바라보고
나누고 싶소
조석으로 변해 가는 인심의 세상에서.
바다는
바다는 바다에만 있는 게 아니야
바다와 함께 한나절 누워 있어봐
하늘에도 땅에도
바다를 목말라하던 가슴에도
바다가 있어 왔음을 알게되지
하룻밤만 파도소리와 함께 있어봐
그대의 몸 속 세포마다 숨어있던
소리들이 어떻게
숨죽이고 있었는지를 알게 될 거야
빗장 걸린 그대의 입술
그대의 고독
그대 감성의 칼날로 다쳐온 가슴이
그대 안에 자리한 바다의 몸부림이었음을
알게 될 거야
저 혼자 일어서서 하염없이
뭍을 기어오르는
바다의 목마름이었음을 알게 될 거야
3. 정리하는 말
판소리 심청가를 보면 심봉사가 눈 뜰 때 조선의 모든 봉사가 눈을 뜨고 급기야 모든 눈먼 짐승들 까지 눈을 떠 광명세상이 되었다고 한다. 이 말이 과연 무슨 말인가.
자기 안에 불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불을 붙여 줄 수 있다. 한 지역 사회 속에 자기 자신에 대한 눈을 뜨고, 문화 사회 역사의 눈을 뜬 사람이 많이 있다면 얼마나 축복된 일이겠는가.
양지(陽地,良知)
이상호님께
한줌의 인정이 그리운 세상
몸과 맘이 시린 사람들은
따뜻한 양지를 그리워한다.
모든 생명의 시작이요 끝
햇빛 같은 사람을 찾고 있다.
세상은 빛을 찾는 목마름으로 시달리고
사람들은 자기 가슴 속 깊이
하늘의 불이 들어 있음을 알지 못한다.
나는 이 세상에 불지르러 왔노라고
인간의 살 속에 묻힌 불을 꺼내러 왔노라고
외치는 그분의 음성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이 손 시린 세상에서
양지가 된 사람
양지이기를 꿈꾸는 사람
그 사람이야말로 만물이 기다리는 사람이다.
이 눈먼 세상의 눈을
열어주는 사람이다.
2003. 11. 10
<출처> 베데스다교회 홈페이지
-한국문화복지협의회. 문화 예술 자원 봉사자교육- (2003. 12,2)
이 병 창 (시인. 민족문학작가회의 )
인간이 지구방문 동안 풀어야할 3대 명제가 있다면 ‘공간, 시간 인간’을 들 수 있다. 세 단어가 모두 사이 간 자를 사용하고 있는 데 바로 여기에 깊은 비밀이 깃들어 있다. 공간이란 존재와 존재의 빈 사이요, 시간이란 그 빈 공간을 이어 주고 채워 주고 도약하게 하는 의미가 깃들어 있다(때는 닿다, 잇다, 에 어원을 두고 있다) 인간은 그 대상이 누구이든지(신, 인간, 자연....) 그 대상과 살아 있는 만남의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자기의 공간과 시간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할 책임이 있다. 오늘의 주제 역시 이런 관점에서 풀어 보기로 하자.
!. 공간과 다양성으로서의 시 이해
늘 흐르는 물처럼 사는 것이 인생을 제대로 사는 비결이라고 노자는 그의 도덕경에서 말했다. 물질계에서 액체, 기체, 고체를 넘나드는 물은 본질은 변하지 않으면서도 때와 장소와 위치에 따라 변용의 묘를 보여주고 있다. 노자는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자기 집착에서 벗어나 물의 지혜를 얻어야함을 설파하고 있다.
물
나는 태어나 본 적이 없소
태초의 하늘을 떠돌다가 오늘은
이승의 우물물로 고여있다 해도
나는 한번도 태어나본 적이 없소
흘러가는 시냇물
파도치는 바다에서
나는 나로 춤을 추고 있었을 뿐
나는 나이를 먹어본 적도 없소
나는 어떤 추억도 없이
여기에서 여기로 흐르고 있을 뿐
꽃샘바람과 함께 흩날리는
봄눈과 함께 나는
하늘에서 땅으로
땅에서 하나의 흐름으로 돌아가고
있을 뿐
나는 어느 하늘 어느 땅에서도
머물러본 적이 없소
나는 이전에 누구를 만난 적도 없소
한 점의 후회도 없이
나는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나로
지금 흘러가고 있을 뿐.
최근 과학이 발전하면서 물의 신비 또한 새롭게 밝혀지고 있다. 물은 인간의 마음과 의식에 반응하면서 물분자가 바뀌어지는 단순한 물질 그 이상의 존재임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또한 물의 흐름을 관찰해 보면 주전자나 수돗물에서 떨어지는 물이 새끼줄처럼 꼬여져 떨어지고 하수구의 경우는 소용돌이 형태로 두세 개의 물줄기가 서로 감고 밀어 당기면서 나아감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소용돌이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공간이 있어야만 한다. 물이 가득 담긴 그릇을 휘저으면 꽈배기가 형성이 되지 않고 반쯤 담긴 물을 휘저으면 소용돌이가 생기는 것이다. 공간이 없으면 서로를 북돋아 주는 힘이 형성되지 않는 물의 이치는 마주 중요한 삶의 지혜를 우리에게 암시해 주고 있다.
슈타이너 연구소의 랄프 마리넬리는 혈액의 움직임 또한 공간으로 인해 구별되어진 두 개의 혈액 흐름이 소용돌이를 이룰 때 말초혈관 까지 도달하는 힘을 얻게 된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 밝혀낸 바 있다. 심장의 펌프질만으로는 손끝 발끝까지 혈액을 보낼 수 없다. 혈액은 혈액의 흐름 그 자체에서 에너지를 발생시키기 때문에 말초혈관 까지 가게 된다는 것이다. 만약 혈관 벽에 콜레스톨이 붙어서 공간을 잠식해 간다면 그 결과는 뻔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공간의 의미는 존재계의 문제들을 풀어 가는 기초중에 기초이다.
공간이란 말 그대로 ‘빈 사이’ 이다. 모든 존재와 존재의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사람과 사람, 산과 산, 나무와 나무, 나무에도 가지와 가지, 잎과 잎 사이에 공간이 있다. 만약 공간이 없다면 존재가 존재 할 수 없는 것이다. 생명의 다양성은 공간을 전제한 말이고 사랑이란 말 역시 상대의 공간을 인정해 주는 데서 출발한다. 상대방의 공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랑이란 사실 집착의 투사에 다름 아님을 칼릴 지브란은 그의 예언자에서 노래하고 있다.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그보다 너희 혼과 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 두라.
서로의 잔을 채워 주되 한쪽의 잔만을 마시지 말라.
서로의 빵을 주되 한쪽의 빵만을 먹지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서로는 혼자 있게 하라.
마치 현악기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줄은 서로 혼자이듯이.
서로 가슴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가슴속에 묶어 두지는 말라.
오직 큰 생명의 손길만이 너희의 가슴을 간직할 수 있다.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다.
- 칼릴 지브란, <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
공간이란 현상세계뿐만 아니라 정신세계에도 존재한다. 공간 안에 만물이 존재하는 것처럼 인간의 의식 형성 역시 공간이 필요하다. 하늘과 땅, 산과 바다, 나무와 바위를 바라 볼 때 각자의 대상은 서로 다른 이미지로 우리의 의식 안에서 떠오른다. 서로 다른 이미지의 차이 때문에 그 차이를 구별 할 수 있는 생각과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런 작용은 인간의 의식 안에 이른바 내면의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이 공간을 무한히 확장해 가는 과정 가운데서 인간의식의 성숙과 진보가 있다. 의식의 진화 과정을 통하여 인간은 하나의 사물을 바라보는 데 있어서도 매우 다양하고 심층적인 눈을 열어 왔다. 사물이건 사람이건 , 아니면 신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다양한 관점(point, angle)으로 보게 되었고 이러한 과정은 인류가 생존하는 한 지속될 것이다. 미술이나 시나 종교와 철학이나 모든 정신활동은 관점의 다양성을 추구해온 업적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만큼 보고 본만큼 느끼고 느낀 만큼 표현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만약 보는 눈이 달라진다면 표현 역시 달라 질 수밖에 없다. 인간의 변화 역시 보이는 눈이 달라 졌다면 그는 확실한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누에는 뽕만 보이고 뽕 생각만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꿀과 이슬이 보이기 시작했다면 그는 이미 나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본다(See)는 것은 인간 경험의 통로이면서 인간의식의 수준을 결정짓는 핵심이다. 시나 그림이 있다면 그 작품은 그 작가의 안목만큼 표현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감상하는 사람 역시 마찬가지이다. 작가와 감상자의 수준이 엄청나게 차이가 날 때 오해와 폭력이 난무하게 된다. 고호처럼 시대를 앞서간 사람들의 경우, 눈먼 자들이 눈 뜬 사람을 비난하고 욕보이는 비극을 천박한 인류의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한 침대에 누워 있다고 해서 함께 있는 것이 아닌 경우가 있듯이 한 시대를 살아간다고 해서 동시대를 살아간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진정한 하늘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 구름을 하늘로 알고 살아 갈 수밖에 없다. 서사시 금강의 시인 신동엽은 본다고 해서 똑 같이 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의 시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에서 노래하고 있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항아리.
아침 저녁
네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畏敬)을
알리라
아침 저녁
네 머리 위 쇠항아릴 찢고
티없이 맑은 구원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憐憫)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모아리며.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 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시인은 한 대상의 공간을 파악하는 사람이다. 수맥을 찾아 들어가는 시추기처럼 존재의 깊이에 숨어있는 진실의 공간을 탐색하는 사람이다.
시인
눈빛이 머무는 곳마다
모든 사물의 하늘을 열어주는 사람
자비로운 젖가슴으로 그 하늘을
안아주는 사람
허공을 날아가는 화살도 알고 보면
날아가지 않고 있음을 ,
떨어지는 낙엽도
사실은 떨어지지 않고 있음을
볼 수 있는 사람
이승의 탄식 소리를 바라보며
하늘의 울음을 대신
울어주는 사람
그대.
공간은 말 그대로 '빈 사이'일 뿐이다. 그러므로 공간 그 자체의 구별이나 차별은 없다. 다만 그 없음에서 모든 있음이 존재하고 있음의 세계는 수많은 다양성과 역동성이 있지만 없음의 세계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신비로울 뿐이다. 즉 공즉시색이다.
태풍의 눈이 고요한 것처럼 우리의 내면에서도 그러한 일이 가능하다. 온갖 감정의 일렁임과 광기의 바람이 일어날 때조차 우리 영혼의 지성소에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의 기본 과제는 보이는 공간과 보여지지 않는 의식의 공간을 함께 공유해야 한다. 보여지는 세계의 땅 평수만 헤아릴 일이 아니라 내 의식의 지평을 여는 일은 더욱 중요하다 . 보여지는 공간의식(중심점이 하나)이 깨어질 때 그는 바로 ‘여기’(일체가 중심)의 세계를 볼 수 있다.
그대에게
그리워는 해도
염려하지는 않겠소
손 시린 세상의 능선 길을 걸어가는
그대의 뒷모습에서
흐르는 외로움이 발자국마다
고여 있다 해도
나는 그대를 염려하지 않겠소
여기에서 보면
그대의 먹구름 위에는
늘 환히 비추는 햇살이
빛나고 있소
여기에서 보면
그대의 가슴속에서 퍼덕이는
날개 짓 소리가 들려 오고 있소
여기에서 보면
그대의 하늘은 눈물겹게 푸르기만 하오
여기에서 보면.
어머니
이건 아니야
이건 나로 사는 게 아니야 하고
머리를 흔들 때
당신은 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오늘처럼
내 가슴의 산천들이 깨어날 때
늘 예배당의 마루를 눈물로 적셔 온
당신의 눈물이
내 열병의 이마 위에 뿌려지고 있습니다.
당신의 길은 너무나도
좁은 길이었습니다.
한 곡조의 선율이 지나가고
또 다른 선율의 음률이 이어지듯
그렇게 이어져 온 파란의 세월 속에서
어머니
당신의 주름은 깊기만 합니다.
나는 당신의 자궁처럼 좁은
그 길을 통해서
오늘 이렇게 여기 있습니다.
그 어느 곳도 아닌 여기
눈물과 탄식과 죽음을 넘어선 자리
내가 당신을 낳아 주는 자리
그리하여 당신은 나의 딸이 되고
영원한 누이가 되는 자리
지금 여기에서
홀로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2. 의식의 도약 연습 - 바라 봄에서 되어 봄으로
하나의 언어도 사전적 의미, 예술적 의미, 종교적 의미에 따라 그 뜻이 춤을 춘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의식이나 느낌 역시 바라보는 자의 눈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하나의 사물도 구경하듯이 바라볼 수도 있고 그 대상과 하나되어 대화를 나눌 수도 있다. 사물을 바라 볼 뿐 만 아니라 소리까지 바라 볼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觀世音)
매미 소리 속에 매미가 있다
경기전의 느티나무 등걸에서
자기 껍질을 벗고 나온 매미
온 몸을 비워 내지르는
매미 소리 속에 매미가 있다.
오늘 나는 어떤 매미가 되고 있는 건가
어떤 껍질 벗은 소리가 되어
여기에 앉아 있는 건가
제 무게로 떨어지는 낙엽은
바람을 일으키고
떨어진 나뭇잎이 한줄기 바람에
굴러가고 있다.
사람들은 자유롭기를 원하고 행복을 추구한다고 하면서도 적당하게 원할 뿐이지 진실로 원하지는 않는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자유와 행복으로 가는 길에 있어 최대의 걸림돌은 자기 자신이다. 자신에 대한 실상과 직면하는 것을 인간들이 얼마나 두려워하고 피하고 있는 가를 필자는 날마다 실감하고 있다. 눈만 뜨면 빛이 보일텐데 결코 눈을 뜨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현재의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바라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얼마나 나 자신을 두려워하고 무시하고 정죄하고 혼돈에 빠져있는가를 바라보는 데서 인간의 길은 출발해야한다.
바라보기 수련은 모든 수행에 있어 첫 단추와 같다. 석가는 제자들에게 수행의 요점을 밝힌 팔정도에서 바라보기(正見)를 첫째로 꼽고 있고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한 다음 교회가 황제의 권력구조 안에 귀속될 때 영성의 최대위기를 감지하고 사막으로 떠났던 교부들 역시 바라보기 수련을 가장 핵심으로 삼고 있다. 영적인 길의 대부분은 피안의 세계에 대한 경험이 아니라 자신의 몸과 생각과 감정의 흐름을 믿음의 눈으로 순간순간 파악하고 잘 다루어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내적 고요와 평정을 이루는데 있다. 이 부동심(맹자)의 마음이 청결한 마음이요, 건강한 마음이다. 몸과 맘이 하나되는 뫔의 상태요, 나 자신과 바라보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사랑의 상태이다.
감성이 예민한 시인들은 시적 대상과의 일치를 이루는 교감을 노래하고 있다. 고호가 별보다 더 높이 자라고 싶은 나무들의 마음을 그려내듯이 시인들도 시적 대상의 마음과 교통하는 데 익숙하다. 시를 이해하고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점에 대한 이해와 연습이 필요하다.
아들에게
잘 익은 석양 한번 만나고 오라
능선으로 올라가라 했더니
오늘 바라본 노을은
진홍빛이었다고 만 말하는구나.
그것뿐이었더냐
셀 수 없는 하늘 빛깔 중에
너는 오직 하나의 색깔과 느낌을
선택했을 뿐.
바쁜 호흡으로 다녀온 너의 걸음에는
어떤 만남도 보이지 않는구나.
아들아
바라본 다는 것은 임무완수가
아니란다.
조금만 더 햇빛이 네 손등에
닿는 것을 보았더라면
마음껏 바람을 허락하는
구름을 바라볼 수 있었다면
때로는 지는 노을이
너의 살도 되고 피도 될 수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
너의 망막 속에 비쳐진 진홍 빛
그 너머 너머에서 지고 있는
너의 노을을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대에게(2)
내가 이 세상에 와서 배운 것은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는 일이오
숨을 고르고 또 고르면서
바라보는 일이오
그렇게 바라보면 구르는 돌맹이도
함부로 구르는 법이 없었오
슬픔도 슬픔이 아니고
고통 또한 고통이 아니었소.
한 모금의 찻물 속에도
물과 다기와 함께 나누는 사람에 따라
춤추는 맛의 비밀이 숨어 있듯이
가을 강물과
해부 당하는 닭의 몸통 속에서도
나의 하늘이 있었소
인간의 어떤 기대와 욕망보다도
더 깊은 하늘이.
나는 그 하늘에서 울고 계신
하느님을 보았소
오늘도 아프리카의 한 모퉁이
케냐의 카바넷에서
내 눈물에 젖고 계신 그분을.
그 하늘을 나는 함께 바라보고
나누고 싶소
조석으로 변해 가는 인심의 세상에서.
바다는
바다는 바다에만 있는 게 아니야
바다와 함께 한나절 누워 있어봐
하늘에도 땅에도
바다를 목말라하던 가슴에도
바다가 있어 왔음을 알게되지
하룻밤만 파도소리와 함께 있어봐
그대의 몸 속 세포마다 숨어있던
소리들이 어떻게
숨죽이고 있었는지를 알게 될 거야
빗장 걸린 그대의 입술
그대의 고독
그대 감성의 칼날로 다쳐온 가슴이
그대 안에 자리한 바다의 몸부림이었음을
알게 될 거야
저 혼자 일어서서 하염없이
뭍을 기어오르는
바다의 목마름이었음을 알게 될 거야
3. 정리하는 말
판소리 심청가를 보면 심봉사가 눈 뜰 때 조선의 모든 봉사가 눈을 뜨고 급기야 모든 눈먼 짐승들 까지 눈을 떠 광명세상이 되었다고 한다. 이 말이 과연 무슨 말인가.
자기 안에 불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불을 붙여 줄 수 있다. 한 지역 사회 속에 자기 자신에 대한 눈을 뜨고, 문화 사회 역사의 눈을 뜬 사람이 많이 있다면 얼마나 축복된 일이겠는가.
양지(陽地,良知)
이상호님께
한줌의 인정이 그리운 세상
몸과 맘이 시린 사람들은
따뜻한 양지를 그리워한다.
모든 생명의 시작이요 끝
햇빛 같은 사람을 찾고 있다.
세상은 빛을 찾는 목마름으로 시달리고
사람들은 자기 가슴 속 깊이
하늘의 불이 들어 있음을 알지 못한다.
나는 이 세상에 불지르러 왔노라고
인간의 살 속에 묻힌 불을 꺼내러 왔노라고
외치는 그분의 음성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이 손 시린 세상에서
양지가 된 사람
양지이기를 꿈꾸는 사람
그 사람이야말로 만물이 기다리는 사람이다.
이 눈먼 세상의 눈을
열어주는 사람이다.
2003. 11. 10
<출처> 베데스다교회 홈페이지
출처 : 이병창 / 시, 어떻게 읽고 감상할 것인가
글쓴이 : 금강하구사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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