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스크랩] 영롱이의 독서일기 / 왕조실록 [고려] - 2부

보배59 2007. 1. 11. 21:39

왕조실록 [고려] - 2부

 

 

 

 


 

 

 

 

 


 

 

 

 

 

 

 

 

2부 - 무신정권시대


정중부의 반란으로 명종이 즉위하면서 고려는 무신시대로 접어든다.
왕이 존재하기는 하나 힘이 없고 모든 권력은 무신들이 장악하여
치열한 정권다툼을 벌이는 가운데 곳곳에선 반란이 잇따른다.
이로 인해 국가 기강은 무너지고 경제는 파탄지경에 이르며
민심은 흉흉해진다.

명종이 즉위하자 정중부, 이의방 등을 벽상공신으로 삼아
그들의 화상을 그려 전각에 붙이는 등 정권을 장악한 무신들은
중방을 설치하고 권력을 농단하면서 조정을 독점하기 위해
각기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고 반란은 끊이지 않았다.
의종은 경주에서 이의민에 의해 허리가 꺾인 채 살해되어 연못에 던져졌다.
경주의 부호장 필인이 의종의 시체를 건지지 않았다면
의종은 능도 없는 왕이 될 뻔했다.

김보당의 반란사건, 조위총의 난등으로 민심이 흉흉해진 가운데
공주 천민 집단 명학소에서 망이 망소이가 주동하여 난을 일으키는 등
수년 동안 도처에서 반란이 끊이지 않는 중에도 정중부를 위시한
그의 측근들은 권력을 남용하여 재산을 축적하고 불법을 자행하였다.
급기야 권력 찬탈의 기회를 엿보던 경대승이 정중부를 살해하고
이 측근들을 제거하였고 권력을 독점한 경대승은
정중부의 귀신을 보고 놀라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한다.
경대승 측근들은 유배되고 이의민에게 정권이 돌아갔다

명종은 왕위에서 쫓겨나 창락궁에 연금되었다가 이질에 걸려
생을 마감한다.
명종대에는 김보당의 난, 조위총의 난, 망이 망소이의 난,
효심과 김사미의 난등이 일어났고
특히 망이 망소이의 난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고려 사회의 신분 질서를 타파하고 스스로 인간다운 권리를 찾고자
일으킨 신분해방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김사미의 난 효심의 난들이 발생하고 이의민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 최충헌은
연로한 명종을 내 쫒고 신종을 새로운 왕에 옹립하게 된다.
신종시대는 6여년의 짧은 기간 최씨 무신정권의 장기 집권의 기반을
닦게 되고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끊이지 않는 등
고려 사회는 건국 이래 최악의 상태를 맞이한다.
최충헌이 정권을 장악하여 권력을 남용하자 그의 종 만적이 난을 도모한다.
만적의 난 이후 최충헌은 개경 전역에 수하들을 배치시켜
백성들을 감시 하게 하고 세력을 키우는 자가 있으면 가차 없이 죽이거나
귀양을 보내는 등 공포정치를 실시한다.
이때 이규보를 등용하여 정중부난 이후 자취를 감췄던 문인을
등용하기도 한다.
교정도감을 설치하여 국정 전반에 걸친 사안들을 처결하도록 한다.

선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희종역시도 왕권은 없었으나
부왕의 선위를 받아 왕실의 예법에 따라 정식으로 왕위에 올랐다는 점에서
즉위에 대한 대의- 명분이 분명했고
이런 이유로 최충헌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가시도 되기 시작한다.
즉위년에 이광실 등 30여명이 최충헌 부자를 살해하기 위해 모의하다가
발각되고 5년 뒤 청교역리 3명, 우승경, 왕준명등 많은 사람들이  
최충헌 부자를 살해할 계획을 세운다.
왕준명이 궁궐 내에서 자기를 살해하려는 음모에 휘말려 가까스로
목숨을 구하고 이 일을 방관했다는 이유로 희종을 폐위시켜
강화도에 유배시키니 희종의 나이 혈기 왕성한 31세
희종은 다시 자란도에 이배되어 머물다가 법천 정사로 옮겨 생을 마감한다.

최충헌은 희종을 내쫒고 강종을 내세운다.
강종은 어린 시절 무신 정권의 틈바구니 속에서 목숨을 위협을 느끼며
지냈고 태자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무신들의 기세에 눌려
제대로 말 한마디 못하고 살았다.
부왕 명종이 강제로 폐위 당함에 따라 강화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희종이 왕권 회복을 위해 최충헌을 제거하려다 실패하는 바람에
환갑을 앞둔 나이에 곤룡포를 입게 되었다.

최씨 무신정권이 안정기로 접어든 고종 시대는
몽고의 흥기로 고려를 비롯한 아시아 국가 전체가 전쟁에 휘말린다.
7차에 걸쳐 몽고의 침입이 있게 되는데 제3차 침입 때
민족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 팔만대장경을 조판하며 항전을 한다.
팔만대장경은 고종 때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만든 목판각으로
현재 해인사 장격각에 보관하고 있기에 해인사 고려 대장도감판인데
고려시대 판각되었다는 데 의미를 두어 고려 대장경이라고도 한다.
매수가 8만여 판에 달하고 8만 4천 번뇌를 풀어내는 8만 4천 법문이
수록되어 있어 팔만대장경이라고 부른다.
팔만 대장경은  단순한 경전이 아니라 고려인들의 민족적 자긍심과
국가에 대한 믿음을 엿볼 수 있는 정신적 산물이며,
여몽 30년 전쟁이라고 뻘 구덩이 속에서 피어오른 눈부신 연꽃이었다.
고종은 재위기간 내내 숱한 전쟁을 겪다가 몽고와 화의 조약을 맺은
강화도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는 데 재위 기간이 45년이 넘어
고려왕 중 재위기간이 가장 긴 왕이었다.
최충헌이 병상에 눕자 최이(최우)가 실직적인 권력자가 되는데
그는 한림에 많은 선비들을 등용하여 무신정권 성립이후
가장 많은 무신들을 배출하는 등 인망을 얻게 위해 노력을 하게 되고
도둑이 들끓자 야간 경비를 담당하는 일종의 야별초를 조직하여
야간 순찰을 돌게 하는데 이것은 훗날 삼별초로 발전하여
무신 정권의 전위 부대 역할을 하게 된다.
또 마지막 까지 몽고에 항복하지 않고
배중손의 지휘 아래 삼별초의 난을 일으키기도 한다.

원종시대는 무신 정권의 말기이자 원의 고려 복속 정책이 본격화된 시기로
고려 조정은 왕실 중심의 친몽파와 무신 중심의 반몽파로 갈라진다.
원종은 몽고의 힘을 빌려 왕권을 회복하려 하고
무신정권은 그런 왕실의 정책을 경계하며
몽고의 간섭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힘을 형성하려 한다.
결국 이것은 쌍방간 힘 대결로 번지게 되어
몽고의 내정간섭의 빌미를 확대시키는 계기가 된다.
원종의 친몽 정권이 들어서자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가 난을 일으켰고
삼별초가 몰락하면서 몽고의 내정간섭은 가속화 되며
이후 고려는 100년 동안 원나라의 지배를 받게 된다.
원나라의 매빙사가 남편이 없는 부녀자들을 요구하자 결혼도감을 설치하고
민간에 혼자 사는 여자, 역적의 처, 노비의 딸 등을 뽑아
원에 공녀로 보내는 처지가 된다.
원종시대 유럽에서는 스콜라 철학이 일어나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주역, 신학대전등을 저술한다.

원세조의 부마가  된 충렬왕이 즉위하면서
고려는 급속도로 원의 속국으로 전락하게 되고
사회전반에 변발과 호복차람의 몽고 풍속이 만연하여
고려사회는 점차 자생력을 잃어간다.
원나라는 일본정벌을 준비하기 위해 정동행성을 설치하고
충렬왕는 원 세조 쿠빌라이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여
그녀가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며 왕권을 능멸하자
여색과 사냥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는다.

이 시기 일연은 대장경 주조 작업에 참여하기도 하고
삼국유사를 집필하기 시작한다.
삼국유사는 단순한 설화집이나 민담집이 아니라 형식상의 차이가 있을 뿐
분명히 일연이 청년시절 사료를 모아 70세 이후 노년기에 집필한
역사서이며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제자 무극에 의해 목판본으로 간행된다.

원 세조 쿠빌라이의 외손인 충선왕이 24세 젊은 나이로 즉위하나
왕비 계국대장공주(원나라 진왕의 딸)와의 불화로 왕위에서 쫓겨나
원나라로 압송되었다가 약 10년 뒤 복위하게 되면서
고려는 몽고에 대한 의존도가 더욱 높아진다.
충선왕은 교서를 통해 동성혼을 법으로 금지시킨다.
충선왕은 왕위를 아들(충숙왕)에 물려주면서 조카를 세자로 세우게 되는데
이것은 고려 조정을 왕위 쟁탈전의 소용돌이로 휘몰아 가고
원나라에 소환당하는 수모를 당하다가
급기야 왕위를 내놓아야 하는 위기 상황에 몰린다.
충숙왕은 복국 공주(원나라 영왕의 딸)의 입국으로 밀려난
덕비 홍씨를 잊지 못하고 자주 미행을 나갔으며
정사는 뒷전으로 하고 사냥과 주색을 즐겼다.
충숙왕 대 이탈리아에서는 인문주의가 강성하고
그리스에서는 문학이 부흥하는 한편 단테의 신곡이 완성되어
유럽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던진다.

충숙왕의 장남 충혜왕은 16세에 왕위에 오르나
한 나라를 통치할 만한 인격을 갖추지 못한데다 성격마저 포악하여
정사는 뒷전이고 향락과 여색에 빠져 지냈다.
충혜왕은 연회가 끝나고 숙공휘령공주의 침실을 덮쳤다가
공주가 완강하게 저항하자 수하들을 시켜 양팔과 다리를 잡게 한 다음
입을 틀어막고 강간을 자행하여
훗날 원 왕실에서 충혜왕을 폐위시키는 결정적 요인이 된다.
충혜왕은 민가의 아녀자들은 물론 자신의 서모까지도 서슴없이 강간하였다.

어린 충목왕이 즉위하자 덕녕 공주(정순국의공주)의 섭정이 시작된다.
덕녕공주은 충혜왕이 신축한 신궁을 헐고 그 자리에
학문을 진작시키기 위해 숭문관을 세웠다.
덕녕공주의 지극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충목왕은 12세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하는 데
너무 이른 나이 아버지를 잃고 왕위에 오른 것이 화근이었다.

충혜왕의 둘째 아들 충정왕대엔 전국이 왜구를 인해 뒤숭숭해지자
원나라 순제는 고려 조정을 안정시키기 위해 충정왕을 폐위시킨다.
충정왕은 강화도에 유배도어 지내다가
공민왕에 의해 15세의 어린 나이에 독살되었다.

원의 책봉을 받아 왕위에 오른 공민왕(충숙왕의 차남, 충혜왕의 동복 아우)
이 시기 원은 홍건적의 봉기로 급격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되며
공민왕은 배원정책을 골격으로 하는 일련의 개혁정책을 통해
국권을 되찾고 잃었던 북방의 영토를 회복한다.
이로써 고려는 100여년간 지속된 원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국가체제 구축을 위해 매진한다.
공민왕은 고려 풍속을 회복하기 위해 변발과 호복 등의 몽고 풍속을
금지시켰고 이자춘(이성계 아버지)의 내조에 힘입어 존속해 온
쌍성총관부를 폐지하고 원나라에 빼앗겼던 영토를 회복하기 시작한다.
계속되는 전란과 산고를 이기지 못한 노국공주의 죽음 등으로
절망감에 사로 잡하게 되고 신돈에게 정사를 맡기고 불사에 전념하게 된다.
신돈의 힘이 날로 기세를 떨치자 공민왕은 신돈을 유배시킨 후
사형을 시킨다.
신돈이 제거된 후 공민왕은 변태적인 행동을 자주 하게 되는데
젊고 예쁜 시녀들을 방안으로 불러 들어 귀족 아들과 함께
난삽한 음행을 하도록 하고 자신은 문틈으로 엿보곤 했다.
마음이 동하면 동성연애를 즐기기도 했고
후계자가 없자 동성연애를 즐기던 홍륜과 한안들을 시켜
왕비를 강간토록 했다.
익비가 잉태를 하게 되자 익비 몸 속의 아이를 자기 자식으로
만들기 위해 홍륜을 죽이려 하지만 이를 알게 된 홍륜 무리들은
침전에 침입하여 만취한 상태로 잠들어 있는 공민왕을 죽이는 데 성공한다.
이 시기 이제현은 역옹패설을 저술한다.
이제현 충렬, 충선, 충숙, 충혜, 충목, 충정, 공민왕 시대를 거쳐
관직 생활을 하였으나 단 한번도 유배된 적이 없는 대단한 정치가였고
고려 성리학을 최초로 들여온 백이정에게 배우고 권보에게 학문을 익혀
이곡과 이색 부자를 길러낸 대학자였다.
이제현이 공민왕 초기 개혁을 주도했다면
후기 개혁을 주도한 사람은 신돈이었다
신돈은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많은 양민들이 노비에서 환원되었고
권세가들이 부당하게 빼앗은 토지의 상당부분을 원 주인에게
되돌려 주거나 국가에 환속시킴으로써 경제적 안정을 꾀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고 성균관을 중영하여 유학자들을 대거 배출,
조선 개국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신진사대부 층의 성장을
촉진하게 하였다.
그러나 신돈은 우왕과 창왕을 신돈을 후손으로 인식시켜
조선 왕조 성립을 합리화 하려는 조선 개국 세력의 역사 왜곡작업으로 인해
왕위를 찬탈한 반역자나 국정을 문란케 한 간신으로 인식되어 왔다.
공민왕 시대 중국은 홍건적 지도자였던 주원장이 명을 건국함으로써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고 이탈리아의 보카치오는 데카메론을 완성했다.  

공민왕이 살해당하자 어린 우왕(공민왕의장남)을 즉위시킨
이인임 일파가 정권을 장악한다.
우왕은 공민왕과 시비 반야 소생인데 공민왕이 원래 자식이 없어 고민하고
있던 중 신돈이 자신의 여종 반야를 바쳐 아이를 얻으라고 권유,
공민왕이 반야와 동침했고 그녀가 아이를 잉태했다.
반야가 만삭이 되자 산돈은 친구 승려 능우의 어머니에게 반야를 맡겼다.
능우 어머니 집에서 출산한 반야는 1년 뒤 신돈의 집에서 기거했고
신돈이 역모 죄로 몰려 수원으로 유배되자 공민왕이 백관에게
자기 아들임을 밝히고 입궐토록 한다.
우왕대 명나라는 일방적으로 철령 이북 땅을 자신들의 요동부에
귀속시키겠다고 통보해 오고 고려는 자주성을 회복하고
고구려의 고토를 되찾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최영의 건의를 받아 들여
요동을 정벌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이성계는 사불가론을 내세워 요동정벌을 무모함을 역설하며
우왕을 설득하였지만 출병을 강행하려는 고집을 꺾지 않는다.
사불가론은 소국이 대국을 거역하는 것은 불가한 일
여름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농사에 지장을 초래하니 불가한 일
원정을 틈타 왜적이 침입할 우려가 있으니 불가한 일
장마로 인해 활에 먹인 아교가 풀릴 염려가 있고 군사들이 병에 걸릴 우려가
있으니 불가한 일이라는 것
이에 다시 이성계는 군대를 서경에 머물게 하였다가
가을에 출병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지만
우왕과 최영은 이 의견을 수용하지 않았다.
일단 출병을 한 이성계 등은 압록강의 위화도에 머물러 있다가
우왕에게 회군을 요청하지만 허락하지 않자
조민수와 협의하여 회군을 단행한다.
회군 소식을 접한 최영이 반란군을 진압하려다 되려
이성계와 조민수등에게 밀리게 되고 체포되어 유배지로 떠났으며
우왕도 폐위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강릉으로 이배되었다.
우왕이 폐위된 뒤 창이 왕위를 이어받았지만 2년도 채 못 되어 폐위되고
신종의 7세손인 공양왕이 즉위한다.
공양왕에 의해 우왕은 살해된다.
우왕은 신돈의 자식이라 하여 왕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실록도 편찬되지 않았다.

이성계와 조민수 위화도 회군으로 최영 세력이 축출되고
우왕이 폐위되자 조정은 회군 세력에 의해 장악된다.
하지만 조민수 세력과 이성게 세력으로 갈라져 패권다툼의 양상을
띠게 된다.
이성계 일파는 종친 중에 한 사람을 왕으로 세우자고 하는 데 반해
조민수 일파는 우왕의 아들 창을 왕으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히여
당시 명망이 높던 이색의 도움으로 창이 9세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니
33대 창왕
이성계파의 개혁 단행 움직임을 보고 있던 조민수는
개혁안에 거부감을 보였다는 이유로 유배되고
이성계파는 조준, 정도전, 정몽주등과 결탁하여 폐가입진의 논리로
창왕을 폐위하려는 계획을 꾸민다.
그들은 우왕을 폐위시켰기 때문에 창왕이 지신들을 척결할 것이라는
판단 하에 우왕과 창왕을 신돈을 후손으로 규정하려 하였고
김저와 정득후 등이 중심이 되어 이성계를 죽이고
우왕을 복위시키려가 발각되어
정득후는 자살을 하게 되고 김저의 자백을 받아 공모했던 자들을
척결함으로써 반 이성계파가 대거 축출한다.
그 뒤 창왕은 폐위되어 강화도로 보내졌으며 우왕과 마찬가지로
신돈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실록이 편찬되지 않았다.

우왕 복위 사건 이후 이성계 일파는 정몽주등과 결탁하여
폐가입지의 명분으로 창왕을 폐위하고 역성혁명을 노리게 된다.
이들 일파에 의해 추대를 받아 불혹을 넘긴 나이에 34대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공양왕
공양왕대 신진 세력들은 경연제를 도입하여 정치 논쟁을 활성화시키고
과거에 무과를 신설하여 군대의 질을 높였으며
주자가례를 시행하여 집집마다 가묘를 세우게 하고
양반 출신중에 출가한 자들은 환속시켜 본업에 종사토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불교의 경제적 기반을 없애기 위해 사찰의 재산을 몰수하고
국고를 환수하였으며 오교양종을 해산하여 군대를 보충하였다.
과전법을 실시하여 녹제와 전제를 개편하였으며 노비결송법을 정하였고
도읍을 한양으로 옮겼으나 민심이 동요하자 다시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신진세력들의 개혁정책은 가속화 되었지만
정몽주, 이숭인 이종학들의 온건 개혁파들은
고려 왕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순차적 개혁을 실시하는 것이
사회 전반의 무리를 최소화하고 신하의 도리라고 주장하게 된다.
그리하여 정몽주가 조준, 남은, 정도전등 급진 개혁파를 탄핵하여
유배시키자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온건 개혁파의 실력행사에
위기감을 느껴 수하를 시켜 정몽주를 살해한다.
정몽주는 정습명의 후손 정운관의 아들이다.
정몸주 이외 고려 왕조에 대한 충성심을 버리지 않은 신하들을
두문동 72현으로 칭하였는데 이들은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자
경기도 개풍군 광덕산 서쪽기슭에 자리한 두문동으로 찾아 들었고
그들은 동네 동서쪽에 문을 걸어 잠그고
일체 동네 밖으로 나오지 않아 두문불출이라는 말이 생겼다.
이방원의 하여가와 정몽주의 단심가는 유명하다.

정몽주가 살해되자 이성계파가 득세하게 되고
이성계파는 역성혁명에 걸림돌이 되는 세력들을 척결하고
정도전을 유배지에서 소환하여 청계에 복귀시키니
역성혁명은 구체화 되었고 마침내 공양왕을 폐위,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할 것을 결정한다.
이성계는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고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

이로써 고려 왕조는 개국 474년 만에 34대 공양왕을 끝으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게 되었고
고려왕조를 멸망시킨 이성계는 정책적으로 왕씨들을 멸족시켜 버린다.
왕씨들은 어머니의 성을 따르거나 全, 鈺, 龍, 田씨 등으로 성을 바꾸고
살아야 했으며 공양양은 원주에 유배되어 간성으로 이배 되었다가
이성계의 명령에 의해 사사되었다.

출처 : 영롱이의 독서일기 / 왕조실록 [고려] - 2부
글쓴이 : 금강하구사람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