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스크랩]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읽고...

보배59 2006. 10. 8. 11:37
1.문제의 발단
러셀에 의하면 인간의 정신이란 기억의 강이다. 어제의‘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나는 없는 것이다. 강은 흐를 때에만 강이다. 최초의 기억의 강은 그 발원이 없다. 기억이전의 기억은 없기 때문이다. 무한한 평면위의 물방울을 생각해보라. 그럼 어떻게 강은 생겼을까? 기억이란 의식에 대한 기억이다. 무의식은 기억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 여기에서 그 강이 생겨나는 걸까? 마지막 장, 꿈-과정의 심리학에서 난 문제에 봉착했다. 프로이트는 ‘심리’에 대한 입장 차이를 소개하면서 ‘철학자’와 ‘의사’의 비유를 든다. 철학자는 ‘심리적인 것’은 ‘의식적인 것’이며 ‘무의식적인 심리적 과정들’은 명백한 모순이라고 주장하지만 (자신은 포함한)‘의사’들의 주장은 전혀 다르다고 말한다. ‘사람의 의식을 자극하지 않고서 지극히 복잡하고 정확한 사고 과정이 일어날 수 있다’는 부동의 확신을 갖게 하는 임상적 데이터를 수없이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심리적 과정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혼란스럽다. 심리가 무의식의 지휘대로 발동하는 정신활동이라면 우리 인간의 심리가 이리도 복잡해질 수 있었을까? 프로이트의 ‘의식’이란 개념은 우리가 믿어왔던 ‘정신’이 아니란 말인가? 그는 그렇다고 과감히 주장한다. 1914년 추가한 각주를 통해 ‘뒤 프렐’의 ‘신비의 철학’을 언급하며 ‘의식’과 ‘정신’은 전혀 별개의 것이라고 역설한다. 그렇다면, (의식에 대한)기억이 작동해야만 심리가 발생할텐데 기억과는 무관하게 보이는 무의식은 무엇으로 심리활동을 한다는 말인가. 무의식은 기억을 초월해 있는가? 아니면 기억조차도 무의식에 복종해야하는 정신기재인가?

2.문제의 전개
강은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끊임없이 흐른다. 기억의 강의 발원이 없다는 말은 기억은 기억하기 전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기억하기 전의 상태, 그러니까 시간적으로 보면 물방울이 흐르기 직전까지의 상태. 이것이 흐르면 기억이 작동한다. 한마디로 어떤 자국이 최초로 생기는 것이다. 이 물방울은 처음엔 무의식에 속해있다고 보여진다. 흐르기 시작하면서 이 무의식은 물방울을 의식에게 양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 흐르기 시작하면서 기억되기 때문이다. 마침내 강물처럼 흐르기 시작하면 기억이 거세지며 차츰 무의식은 강물에 침식되어 희미해진다. 의식이 차츰 생기고 그것은 자꾸 흐르면서 더욱더 의식의 활동에 박차를 가한다. 이쯤해서 정신이 태동한다고 보면 되지 않을까? 여기에서 강줄기가 생기고 이것이 심리라는 게 아닌가?

3.프로이트 꿈-과정의 심리학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개꿈. 이게 프로이트에게는 심리활동, 그것도 무의식에서 비롯된 심리활동이라고 말한다. 프로이트가 정리한 전의식과 무의식의 개념을 먼저 살펴보자. 전의식이란 조건만 충족되면 항상 의식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무의식과 의식 사이에 쳐있는 병풍과 같아서 무의식이 의식에 이르는 통로를 조절한다. 무의식이란 그것이 의식화되고 현상화되면 곤란해질 것 같아 가둬진 그 무엇이다. 전의식을 관장하는 이것이 ‘심리적 힘’이다. “심급”이 두 가지 존재한다. 일차 심급은 소원이 불쾌한 것이냐 그렇지 않은 것이냐에 따라 자동으로 규제된다. 이차 심급은 이미 기억돼있는 리비도 집중된 에너지가 지각을 뚫고나가 심리적 힘들을 제압해 뭔가를 구속했던 것을 허용하는 게 아니라, 자의적 운동에 의해 마침내 외부 세계를 변화시켜 충족 대상을 실제로 지각할 수 있는 우회로로, 욕구 자극에서 비롯된 흥분을 인도하는 일을 한다. 이렇게 되면 무의식은 어떤 목적에 부합한 것이 된다. 이 두 심급은 서로에게 비판한다. ‘심리’란 이런 싸움들에서 비롯된다. 심리학에 있어서 꿈의 망각, 기억의 퇴행, 소원 성취, 꿈에 의한 각성, 꿈의 억압 등은 ‘기억’이 무의식 상태에서 완전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무의식이 기억을 위해 봉사한다는 의미이다. 그 이유는 지각조직이 우리의 의식에 아주 다양한 감각적 특질을 제공하는데 그런 변화를 보존할 능력인 기억력이 이 지각조직엔 없다는 것이다.

4.프로이트의 꿈-해석
인류 역사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갖고 있었음에도 왜 꿈은 해석되지 않고 있었는가. 여기에서 프로이트는 꿈을 연구했을 것이다. 꿈에는 의미가 있으며 어떤 심리학적 원칙에 의해서 꿈이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하는 대전제하에 꿈을 해석한다. 해몽이란 무의미하게 보이는 꿈을 이해할 수 있는 삶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꿈을 해석하는 데는 꿈이 어떤 식으로든 다른 사물의 기호나 대체물, 증후의 성격을 지니며 배후에 숨어 있는 진술 또한 연상의 고리를 통해 역추적하여 얻어낼 수 있다는 전제 조건이 수반된다. 이렇게 가정하면 대체하는 것과 대체되는 것. 기억에 남아있는 꿈과 연상을 통해 찾아낸 다음 깨어 있는 동안의 삶의 언어로 번역해 낸 꿈-사고의 분리가 불가피해진다. 프로이트는 전자를 외현적 꿈-내용, 후자를 잠재적 꿈-사고라 칭한다. 우리가 꿈의 의미라 할 수 있는 것은 후자인 잠재적 꿈-사고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꿈꾸는 사람의 평소 정신생활과 꿈의 관계가 꿈-사고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꿈-사고를 지배하는 것은 ‘소원’이다. 그것도 ‘무의식’적 소원이다. 여러 동인자에 의해 꿈을 꿀 수 있지만 프로이트의 관심은 정신 신경증 환자의 꿈에 집중된다. 꿈의 형성이 정신 심리적 요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심대했을 뿐 아니라, 그런 병적 증상을 통해 꿈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꿈은 소원 성취를 위한 것이다. 이 성취를 위해 꿈은 ‘왜곡’하고 ‘압축’하고 ‘전위’하고 ‘묘사’하고 ‘가공’까지 한다. 왜 그럴까. 그것도 소원 성취를 위해서이다. 꿈-작업이 이렇게 복잡하게 진행되는 데는 한가지 중요한 이유 때문이다. 잠을 깨지 않고 꿈을 끝까지 잘 꾸게 하기 위해서이다. 꿈을 끝까지 잘 꾸어야만 소원이 이뤄지고 잠을 잘 자야만 꿈을 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상기한 꿈-작업이 이뤄진다. ‘압축작업’- 신문의 삽화는 많은 것을 얘기한다. 서술의 생략. 몇 장의 그림만으로 무엇을 설명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열 효용의 법칙이다. 의식을 좀 쉬게 하면서 소원을 얘기하려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 ‘전위작업’- 이건 순전히 심리적인 힘이다. 꿈이 왜곡돼 보이는 이유는 이것 때문이다. 내적인 방어, 검열의 영향을 받아 바뀌는 것이다. ‘묘사’- 꿈은 상형문자의 그것이다. 내용을 진술하지 못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묘사를 해야 하는 법. 한문을 떠올리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한문은 내용이기보다는 묘사이다. ‘가공’-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자신이 꿈을 꾸면서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경우. 벼랑에서 떨어진다. 놀라서 깨어나면 꿈은 중단된다. 그러나 이게 꿈이구나하고 자각하면 꿈은 계속 진행된다. 심리적 가공이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꿈-내용의 첨가나 증대에 관여한다.

5.반론들
첫 째 반론- 우리에게는 실제 모습 그대로의 꿈을 알고 있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많은 부분이 부실한 기억력 때문에 훼손되거나 내용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나중에 이야기하는 꿈-내용이 일관성이 없고 그 꿈-내용을 말하는 와중에 망각에 의해 생겨난 틈새를 임의로 선택한 새로운 자료로 메우고 장식하고 정돈하여 꿈의 실제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판단할 수 없게 되는 경우는? 프로이트는 이런 반론에 이렇게 대꾸한다. <나는 환자들과 꿈을 분석하면서 이러한 주장을 다음과 같이 시험해 보았는데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다. 환자들이 들려주는 꿈 이야기가 처음에 이해하기 어렵게 보이면, 나는 다시 한 번 이야기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면 똑같은 말로 표현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표현이 달라지는 부분들이야말로 꿈 위장이 실패한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부분들은 지크프리트의 옷에 수놓인 표시가 하겐을 도왔던 것처럼 내게 큰 도움을 주며, 그곳에서부터 꿈-해석을 시작할 수 있다. 이야기하는 사람은 다시 한 번 말해 달라는 요구를 들으면, 내가 꿈을 해결하기 위해 특별히 노력할 생각이라는 것을 깨닫고 경계심을 품는다. 그는 저항의 충동을 느끼고 노골적인 표현을 동떨어진 표현으로 대체하면서 꿈의 위장이 약한 부분을 보호한다. 그러면 오히려 나는 빠뜨린 표현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꿈-해석을 저지하려는 노력을 모면, 꿈의 외관을 얼마나 신중하게 형성했는지를 추론할 수 있다.>(600쪽 인용) 꿈이나 세부적인 꿈-재료를 과연 올바르게 재현할 수 있느냐는 의심은 꿈-검열, 즉 꿈-사고가 의식으로 뚫고 들어가는 것에 대한 저항의 부산물일 뿐이다는 주장이다. <이 밖에도 나는 꿈의 망각이 대부분 저항 활동이라는 것을 실제 증거를 통해 증명할 수 있다. 어떤 환자가 꿈을 꾸었지만 흔적 없이 사라져버렸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 그 꿈은 꾸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고, 우리는 분석 작업을 계속한다. 그러다 나는 저항에 부딪치고, 환자에게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면서 설득과 독촉을 통해 그가 불쾌한 생각과 화해하도록 도와준다. 이 작업이 성공하기가 무섭게 그는 이제 무슨 꿈을 꾸었는지도 알겠다고 소리친다. 이날 분석 작업에서 그를 방해한 것과 같은 저항이 꿈 역시 망각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나는 그 저항을 극복하게 하여 꿈을 다시 기억나게 한 셈이다.>(606쪽 인용) 꿈을 잊게 만드는 것은 깨어있는 상태와 수면 상태 사이의 이질감 때문이라기보다는 ‘저항’ 때문이라는 것이다. 둘 째 반론- 모든 표상은 연상에 의해 다른 것과 결합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런 목적 없이 자의적으로 이어지는 사고 흐름을 통해 꿈-사고에 이른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프로이트에 의하면 그 ‘연상’에 의해 다른 것들과 결합하게 하는 것이 바로 ‘심리’라는 것이다. 다만의 우연을 가장할 뿐 그것은 명백한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꿈-해석 과정에서 깊은 성찰을 포기하고 부지 불식 간에 표상들이 떠오르게 할 때, 우리가 목적 없는 표상의 흐름에 자신을 내맡기고 있는 것이라는 주장은 명백히 부당한 것이다. 사실 언제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목적 표상만을 포기할 수 있을 뿐이며, 이것을 포기하는 즉시 미지의 - 대략 표현하면 무의식적인 - 목적 표상들이 주도권을 잡고 원하지 않는 표상들의 흐름을 결정짓는다. 우리의 정신생활이 직접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목적 표상이 없는 생각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나는 그 밖에 어떤 심리적 혼란 상태에서 그러한 생각이 생성되는지 모른다.>(615쪽 인용)


6.꿈-기능에 대한 나의 단견
영장류인 원숭이들도 꿈을 꿀까? 뇌가 있는 고등 동물들은 꿈을 꾼다고 보아야할까? 동물들도 꿈을 꾼다는 가정하에 그 꿈대로 무의식적 소원을 그들의 현실에 적용시키려 한다면 그들의 사회는 어떻게 될까? 그들은 꿈을 꾸지 않든가, 아니면 그들에게도 의지가 있든가 일 것이다. 자는 동안에도 우리의 의식은 죽어있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깨어있는 것도 아니다. 잠을 자기위해서는 의식도 쉬어야한다. 의식의 휴식을 위해 잠이 요구되는지도 모른다. 그렇잖으면 과부하로 뇌가 치명상을 입을 것이다. 흔한 얘기로 머리는 쓸수록 발달된다고 한다. 여기에서 머리는 ‘기억력’을 뜻한다. (의식이)잠을 잘 때는 무의식의 활동이 활발해진다고 봤을 때 그 때의 기억력 역시 왕성할 것이다. 프로이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그 기억력은 지각조직을 활성화시켜 우리의 ‘의식’을 발달시킨다. 결과적으로 무의식은 의식을 위해 존재한다는 뜻이다. 이게 악순환인가? 적어도 뇌의 입장에서 보면 선순환적이다. 꿈은 뇌에 의한, 뇌를 위한, 뇌의 활동이다. 무의식을 통한 심리학적 의미 역시 뇌의 ‘이기성’일 뿐이다. 뇌는 꿈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관철시킨다. 인간기계?

7.꿈-과정의 심리학에 대한 나의 의문들
그럼 꿈은 인간에게 뭔가? 꿈의 의미는? 독후감 첫머리를 ‘문제의 발단’으로 잡은 이유는 이렇다. 이 책을 읽어가면서 중간중간 프로이트가 언급하는 ‘심리’와 ‘꿈’과의 관계.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겠구나 했었는데. 그랬다. 꿈-과정의 심리학이 결론이었다. 아무리 무의식이 낮 동안의 현실과 밤의 꿈 사이를 전횡한다 하더라고 결국은 그 무의식중의 몇 개는 검열을 통과해 의식화 된다. 이른바 전의식이다. 의식의 전단계. 문제는 여기에서 심리가 무의식 쪽으로만 흐른다면 이것은 말 그대로 악순환 아닌가? 프로이트에 의하면 ‘심리’는 ‘무의식’편에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의식’의 편으로 오게했단 말인가. 프로이트의 논리를 좀 확대해석하면 ‘의식’이란 심리적 활동이 아닐뿐더러 ‘의식’은 존재하지 않아야한다. 무한히 평평한 곳의 물방울은 흐르지 않는다. 의식에 어떠한 역할이 남아 있는가? 프로이트는 이제 ‘의식’을 규정하기를 ‘심리적 특질을 지각하기 위한 감각기관’으로서의 역할만이 남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지각 조직의 감각 기관에 의해 외부 세계를 향해 있는 정신 기관은 의식의 감각 기관에 대해서는 그 자체로 외부 세계이며, 의식의 목적론적 정당성은 이러한 관계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정신과 의식은 전혀 다른 세계의 것이란다. 그럼 의식의 합목적성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정확하고 고도로 복잡한 사상이 의식의 개입 없이도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철학자들은, 의식에 어떤 기능을 인정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에게 의식은 완결된 심리적 과정의 불필요한 반영으로 보였다. 의식 조직과 지각 조직 사이의 유사성은 이러한 곤경에서 우리를 구해준다. 우리는 감각 기관을 통한 지각이 도달하는 감각 흥분을 확산시키는 방향으로 주의력 집중을 유도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각 조직의 질적 흥분은 정신 기관 안에서 동원 가능한 양에 대해 방출 조절 장치로서의 역할을 한다. 우리는 의식 조직의 감각 기관이 이와 동일한 기능을 수행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 감각 기관은 새로운 특질들을 인지하면서, 동원 가능한 리비도 집중량의 유도와 합목적적인 배분에 새롭게 일익을 담당한다. 그것은 쾌감과 불쾌감 지각에 의해, 평소 무의식적이며 양의 전위를 통해 작동하는 정신 기관 안에서 리비도 집중의 진행에 영향을 미친다. 불쾌감의 원칙이 리비도 집중의 전위를 자동적으로 조절하는 듯 생각될 수 있지만, 의식이 그러한 특질을 더욱 정교하게 재차 조절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708쪽 인용) 의식은 정신이 아니라 감각 기관일 뿐이다. <의식의 감각 기관이 가동량을 조절함으로써 생겨나는 리비도 과잉 집중의 가치는, 새로운 일련의 특질과 함께 인간을 동물보다 우월하게 하는 새로운 조절 기능의 창출에 의해 목적론적인 관계에서 가장 잘 증명된다. 요컨대 사고 과정들은 사고를 방해할 가능성 때문에 억제되어 마땅한 동반되는 쾌감과 불쾌감 자극들을 제외하고는 그 자체로 아무런 특질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인간의 경우 사고 과정들은 새로운 특질을 부여받기 위해서 연상에 의해 언어 기억과 결합된다. 이 때 언어 기억에 남아 있는 특질의 잔재는 의식의 주의를 끌어, 의식에서 사고에 새로운 리비도 집중이 이루어지게 하는데 충분하다.>(709쪽 인용) 그렇다. 인간의 의식이란 바로 언어의 기억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의식과 언어와 기억은 어쩌면 하나의 개념인지도 모른다. 뭔가에 의해 기울어졌기에 물은 흘렀고 그런 기억들이 언어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의식이란 관계의 산물이다. 이래도 정신이 될 수 없다는 말인가? 왜 융이 집단 무의식을 주장했는지 어렴풋이 짐작된다.

8.글을 마치며
‘꿈의 해석’을 읽으면서 날 곤혹스럽게 한 것 전부를 서술하기란 힘든 것이다. 물음표도 치고 밑줄도 그어가며 읽었지만 막상 요약하고 정리하려니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또, 제대로 분석하기도 바쁜데 자신의 내면을 관찰한다는 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끝으로, 프로이트의 두 가지 말을 소개하며 마무리 지으려 한다. 그가 꿈을 연구하며 부수적으로 얻은 결과물이라고 하지만 중요한 발상이 아닌가 생각되어 소개한다. 프로이트는 전형적인 꿈들을 소개하는 와중에 벌거벗은 꿈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른바 노출-꿈이다. 인간은 수치심을 모르는 어린 시절을 훗날 되돌아보면 그게 낙원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벌거벗었는데 부끄럽지 않다는 것은 하나의 소원인 것이다. 이 개개인의 소원이 집단적으로 작용해서 낙원을 만들고 거기에 집단적으로 빠져들었다는 것이다. 꿈은 밤마다 우리를 그런 낙원으로 데려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다 이윽고 수치심과 두려움이 눈을 뜨는 순간이 오고, 인간은 낙원에서 추방되어 성생활과 문화 활동을 시작한 것이라 생각한다. 여기에서 프로이트는 종교의 유래를 본다. 또 하나 기억나는 말. 인간의 충동 중에는 죽고 싶다는 충동과 사랑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다고 했다. 사랑하고 싶다와 사랑받고 싶다는 똑같은 의미이다. 죽고 싶다는 사랑의 종속변수 같은 것이다. 사랑받지 못하거나 사랑할 수 없으면 죽는 게 낫다는 의미이다. 이 무서운 인간의 이기성을 보자. 꿈도 여기에 철저히 복종한다.
출처 :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읽고...
글쓴이 : 밭가는 돼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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